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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Aug 30. 2018

내 입이 박물관이다

엄마, 

초콜릿 맛있어? 



와플과 초콜릿의 나라 벨기에에 온 것을 축하해! 

우리 같이 달콤한 걸 좋아하는 모녀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잔소리하는 아빠도 없고 말이야. 훗.


벨기에가 초콜릿으로 유명해진 건 1912년 스위스 출신 벨기에인 장 노이하우스(Jean Neuhaus)가 쉘 초콜릿이라고도 불리는 '프랄린'을 개발했기 때문이래. 처음에는 초콜릿 속에 헤이즐넛 가루를 넣은 걸 뜻했는데, 지금은 한 입 크기의 초콜릿 안에 견과류, 버터, 크림, 술 같은 속재료를 채워 넣거나 코코아 가루 같은 토핑으로 장식한 초콜릿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지. 


어릴 때 엄마가 가끔 속에 럼과 같은 리큐르가 들어간 초콜릿을 맛있게 먹었던 게 기억나. 저게 뭘까 싶어서 먹어봤다가 그 싸한 맛에 깜짝 놀라 얼굴을 일그러트렸던 나도 생각나고 말이야. 평소에 술이라곤 마시지도 못하던 엄마가 왜 술이 들어간 초콜릿은 좋아했을까? 어쩌면 그게 엄마에겐 남몰래하던 작은 일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브뤼셀의 거리를 걷다 보면 '고디바'나 '길리안'같은 유명한 초콜릿 브랜드들의 매장도 쉽게 볼 수 있어. 이름 모를 초콜릿 가게는 셀 수도 없이 많고 말이야. 로알드 달의 소설 <찰리의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이 실존한다면 영국이 아니라 분명 벨기에 어딘가에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더라.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커다란 초콜릿을 하나 잡아 포장을 뜯었는데 거기 윌리 웡카의 황금 초대장이 딱 들어있으면! 로또가 따로 없을 텐데 말이야.  


뭐 이번 생엔 로또 같은 윌리 웡카의 초콜릿 공장도 나와는 인연이 될 것 같지 않고. 원한다면 아주 살짝 비슷한 곳엔 갈 수 있어. 바로 브뤼셀의 '초콜릿 박물관'이 그곳이지! 사실 가이드북을 살짝 보니까 씹으면 코스 요리의 맛을 다 느낄 수 있는 껌이나,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사탕 같이 뭔가 엄청난 게 있는 곳은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여행 중이니까 그 지역에서 유명한 '무슨무슨 박물관' 한 곳에는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엄마에게 말했어.



"엄마 저기로 가면 초콜릿 박물관이 있대. 가볼래?"


"거기 가면 뭐 있는데?"

 

"그냥 뭐... 초콜릿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고. 역사나 도구 같은 거 전시되어 있고?"


"입장료 얼만데?"


"6유로."


"야, 그럼 우리 둘이 가면 12유로잖아. 그냥 초콜릿 12유로어치 사 먹자. 그럼 내 입이 초콜릿 박물관이다!"



나는 엄마의 말에 미친 듯이 웃었어. 
와, 논리가 그야말로 반. 박. 불. 가. 


물론 벨기에 초콜릿의 역사나 제조 과정을 눈으로 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었을 거야. 12유로가 아깝지 않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엄마에겐 그것보다 달콤한 초콜릿을 한 입 가득 넣고 우물거리며 딸과 함께 반짝이는 그랑플라스를 걷는 게 6유로를 더욱 가치 있게 쓰는 방법이었던 거지. 


사실 엄마의 이런 '마이 웨이' 여행 감성은 오줌싸개 동상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저기 저게 그 유명한 벨기에의 오줌싸개 동상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야, 저기다! 저기가 와플 1유로 하는 곳이다!"라며 폭풍 직진하는 엄마의 확신에 찬 걸음걸이...



그래, 졸졸졸 오줌 싸는 놈 구경하는 게 뭣이 중허냐.
쫄깃쫄깃 맛 좋은 와플이 1유로라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행동하는 사람이 된 건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 거야. '벨기에 가면 어디를 가서, 무엇을 봐야 한다. 남들은 다 그런다.'는 말이 엄마에게 주는 영향은 정말 1도 없더라고. 그런 엄마가 난 정말 마음에 들어. 


그러고 보니 나... 뉴욕 주에서 1년이나 살았으면서, 맨해튼을 몇 번이나 갔으면서, 한국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자유의 여신상을 끝내 보지 않았구나. 대신 스타벅스 구석 자리에 앉아 스도쿠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 이미 사진으로, 영상으로 수도 없이 본 그 동상을 실제로 보는 것보다 맨해튼의 어느 골목 스타벅스에서 홀로 여유롭게 보내는 시간이 내겐 더 의미 있었거든.  



이런 순간이 정말 많은 것 같아. '내가 왜 이럴까?' 싶을 때 문득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면 엄마가 그러고 있는 거. 너무나 똑같이.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이. 그러면 머릿속에 누군가 시원한 민트차를 들이붓는 것처럼 명쾌해지면서 '아, 엄마 닮아서 그렇구나!'하고 쿡쿡 웃게 되는 거. 어쩜 이럴까, 어쩜 이래. 아무리 엄마와 딸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닮아도 되는 걸까 싶다. 뭐 안 될 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내가 닮은 사람이 엄마라서 참 좋아. 나는 괜히 유쾌한 기분에 빠져 속으로 이렇게 외치면서 씩씩하게 걸어 나가.


브뤼셀 사람들, 길을 비켜주세요. 

여기 입이 초콜릿 박물관인 여자와 그의 딸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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