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예감이 좋아.
파리까지 10시간. 엄마에게는 처음인 장거리 비행이 걱정된 나는 가장 뒷좌석을 예약했어. 그래야 등받이를 최대한 넘겨도 뒤에 앉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잖아. 엄마 성격에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 불편할까 봐 10시간 내내 끙끙댈 거 뻔히 아니까 말이야. 어때 내 센스? 후훗.
우리가 앉은 좌석은 세 명이 앉는 자리였어. 엄마가 복도 쪽에 앉고 나는 엄마의 왼쪽, 그러니까 가운데 자리를 잡았지. 좌석 벨트를 매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나는 엄마가 잘하고 있는지 확인을 했어. 그런데 우리보다 전에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개미허리였는지 엄마의 좌석 벨트는 엄마가 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지 뭐야! 엄마랑 둘이 벨트를 늘리며 뱃살 좀 어떻게 하라며 키득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웃음소리 하나가 더 들려왔어. 돌아보니 안경을 낀 한 여자분이 우리를 따뜻한 눈길로 보고 계셨어.
염색하지 않은 반백의 머리가 어쩐지 기품 있게 느껴지고, 잔잔한 미소에 담긴 에너지가 우아해서 비범한 분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는데... 글쎄 인사를 나누고 보니 수녀님이셨지 뭐야! 한국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들렀다가 파리에 있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셨어.
난 그동안 이런저런 여행을 하면서 비행기에서 만난 사람과의 대화는 지양하는 취향을 만들어 왔거든.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연락처를 나누고 헤어져도 결국엔 헤어지면 그걸로 땡이라 허무하더라고. 그냥 비행기에서는 푹 쉬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게 최고라는 게 내 지론이었지. 그런데 그날은 왜 그런지 그분과 계속 대화를 하고 싶더라.
사실 우리가 이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가 있잖아. 엄마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모두 보내드리고 ‘난 이제 정말 고아야.’라는 생각을 하며 슬픔에 차있었고. 난 삼십 대 초반에 삶의 큰 암초에 부딪혀 집도 절도 없이 몸뚱이 하나 달랑, 허공에 떠있는 상태였고 말이야. 그래서인지 그날 내 옆자리에 앉은 수녀님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사람 같았어. 지금의 혼란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말이야.
그분과 참 많은 대화를 했지만 지금까지 내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는 건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고민에 대한 그분의 대답이었어. 엄마도 알겠지만 나는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강아지 둘을 키우며 난생처음 혼자 살아내야 하는 상황이니까... 생활비를 벌기 위해선 어떤 일이라도 해야 했잖아.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걸로 세 식구가 먹고살 수는 없었고. 그런 고민을 그분에게 털어놓았더니 대답이 얼마나 명쾌했는지.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머릿속 어딘가에서 맑은 지하수가 퐁! 하고 터지는 기분이었어. 뭐라고 하셨냐고? 엄마는 그때 자느라 잘 못 들었지? 있지, 그분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글 쓰는 건 삶이고,
그 삶 속에서 직업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죠.
글 쓰는 삶을 사세요.
다양한 일을 하면서.
나는 수녀님의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의 내 방황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어. 아주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엄마는 어때? 앞으로 엄마는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 건지 궁금해. (제발 이제 다 살았으니 죽는 일만 남았다는 말을 하지 말아. 엄마 아직 환갑도 안 된 청춘이라고! ) 엄마도 젊었을 땐 빌딩 숲을 짧은 스커트 차림으로 당당하게 걷던 커리어 우먼이었지. 그러다 아빠랑 결혼하고는 수공예 공방을 운영하기도 했고, 내가 초등학교 때는 미용사 자격증을 따서 잠시 미용사로 일하기도 했잖아. 그러다 어느 순간 할머니가 집에 오시고, 곧 외할머니도 집으로 오셨어. 그 뒤로는 24시간을 빡세게 일하는 가정 주부이자 간병인으로 10년을 달렸지.
그렇게 다양한 일을 했던 엄마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아니지 아니야. 아직 안 끝났으니까 과거형 말고! 어떤 삶일까? 아직 한참 남은 엄마의 시간이 나는 궁금해. 그게 어떤 것이든 오늘처럼 난 엄마 옆에 딱 붙어서 같이 다닐 거야.
자 그럼 이제 슬슬 내려볼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보니 벌써 파리에 도착했다. 첫날은 파리를 스쳐 지나갈 거야.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기차역으로 가서 벨기에 브뤼셀행 기차를 탈 거야. 엄마의 체력은 벌써 끝나가는 것 같아 걱정이긴 하지만... 엄마가 동의한 일정이니 조금만 힘 내주길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