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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 Nov 20. 2021

모두에겐 각자의 훌라가 있어요.


첫 곡을 배우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몸 쓰는 일을 못하는지 다시 한번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왜 ‘다시 한번’ 이냐 하면, 내가 첫 번째로 그 사실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던 건 태권도를 배울 때였기 때문이다. 


‘마흔 전에 검은 띠!’를 구호로 서른둘에 시작한 취미 태권도는 여전히 파란 띠에 머물러 있다. 아직 검은 띠를 따지 못한 이유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그중 가장 큰 별은 품새이다.  태권도의 가장 기본인 품새는 태권도의 공격과 방어의 기술을 규정된 형식에 맞추어 지도자 없이 혼자 수련할 수 있도록 이어놓은 동작을 말한다. 태극 1장부터 시작해서 8장까지 이어지는 품새는 유단자가 되면 고려, 금강, 태백과 같이 듣기만 해도 멋짐이 폭발하는 단계까지 올라간다. 


물론 나에겐 태극 1장이 금상산과 태백산을 합친 것보다 더 높은 산이었다. 기술을 연결해 놓은 동작, 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특정 동작을 순서에 맞게 암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춤과 비슷했다. 일단 다리는 여기, 손을 여기에 둔 다음, 발을 이리 옮기면서 동시에 팔을 이렇게, 하는 식으로 몸짓을 숙지하는 것이 핵심인데 나는 그게 정말 어려웠다. 같이 수련을 시작한 사람들이 몇 번이면 다 외워서 관장님 없이 연습을 할 때도 나는 혼자 거울 앞에 서서 그 안의 나를 바라보며 ‘내가 뭐하려고 했더라...아...’하고 멍하니 영원 같은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면 유튜브에 ‘태극 1장 거울 모드’를 검색해서 슬로 모션을 여러 번 돌려 보며 복습하고, 수업 시간에도 조금 일찍 도착해 혼자 연습을 해야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훌라는, 나의 훌라는, 그런 태권도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우선 동작을 외워야 한다는 것과, 그를 위해 남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점은 대단히 비슷했다. 하지만 태권도에 없는 단 하나가 훌라에 있고, 그 하나가 모든 것을 다르게 했는데 그건 바로 ‘알로하 정신’이었다. 


하와이의 인사말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알로하(ALOHA)라는 단어에는 단순한 안부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A에는 온유와 너그러움을 뜻하는 알카라이(ALAKAI), L는 조화와 연대를 의미하는 로카히(LOKAHI), O는 긍정과 즐거움의 올루올루(‘OLU’OLU), H는 겸손과 존중을 뜻하는 하아하아 (HA’AHA’A), 그리고 마지막 A는 인내과 끈기를 의미하는 아호누이(AHONUI)이다. 알로하를 삶의 태도로 삼는 하와이 사람들의 정신은 그들의 춤인 훌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훌라를 추는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항상 알로하 정신에 입각한 말과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젠가 스스로에게 실망해 좌절한 나에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훌라는 잘 추고 못 추는 게 없어요. 모두에겐 각자의 훌라가 있는 거죠.”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전문지도자 과정을 시작한 내가 더욱 깊이 좌절하여 ‘다른 분들은 다 잘 추는데, 저 혼자만 너무 못 춰요.’라는 말을 뱉었을 때 선생님은 타인의 훌라를 마음속으로 잘 춘다, 못 춘다 평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더불어 자신의 훌라도 자꾸 부족하다 말하지 말라고, 그건 스스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훌라는 평가하거나 경쟁하는 춤이 아니고, 그런 태도는 알로하 정신에 어긋난다고 말이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습관처럼 만사에 품평의 잣대를 들이대며 살아왔는지, 그게 얼마나 삶에 무례한 태도였는지 말이다. 나는 훌라를 추면서 일거수일투족 자신과 타인을 저울질하며 자만하거나 절망했던 예전의 나와 작별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겸손과 긍정으로 가득 찬 나를 채워 넣었다. 


이젠 누구도 나를 평가할 수 없다. 나 자신 조차도. 


음악을 진심으로 느끼고 이해하면서 그 안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를 몸으로 표현하면 가장 먼저 내가 행복해진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다른 누군가도 덩달아 행복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 그러니 내 무릎이 저 사람의 무릎보다 덜 굽혀져도 괜찮다. 내 골반이 만드는 원이 저 사람의 원 보다 조금 작아도 괜찮다.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 보다 조금 덜 구부러져도 정말 괜찮다! 우리 모두에겐 고유하게 찬연한 각자의 훌라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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