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오빠는 어릴 때부터 TV 속에 유행하는 춤이 나오면 꼭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췄다. 그걸 보다 덩달아 신이 난 내가 춤판에 뛰어들면 아빠는 항상 나를 비웃으며 말했다.
“너 진짜 몸치다. 누구 닮아서 그러냐?”
아빠 닮아서 그렇다. 고등학교 때 기계 체조를 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닮아 가무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오빠 사이에서 아빠와 내가 서로의 삐걱대는 몸짓을 보며 ‘아무리 그래도 제가 그쪽보단 나은 거 같은데요..’하는 표정을 짓는 게 우리 집 흔한 거실 풍경이었다.
내 인생에 춤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절대 못 하는 거. 나랑 분명히 안 맞는 거. 노력해도 알 될 게 뻔해서 노력할 필요조차 없는, DNA에 새겨진 각인.
지금까지 37년을 살며 자발적으로 췄던 춤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학교 다닐 때 체육 대회를 위해 췄던 부채춤이나 신입 사원 장기 자랑에 차출되어 췄던 비의 <Rainism> 도입부의 기이한 동작 (암 거너 비어 밷 보이~ 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그거 맞다.) 정도가 기억하는 내 춤의 역사다. 가끔 흥에 겨워 몸을 흔들었던 적은 있었지만, 그건 그냥 즐거운 마음을 표현하는 조금 큰 제스처 정도라고 여겨왔다.
그런 내가 춤, 그것도 훌라라니!
나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놀라 자빠질 이야기다.
이토록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건 한 편의 애니메이션 때문이다. 2017년 개봉한 디즈니의 <모아나>를 나는 좋아한다. 영화가 나온 그 해에도 봤고, 그 후에도 여러 번. 나는 기분이 조금 꿀꿀하다 싶으면 맥주와 감자칩을 배 위에 올려놓고 <모아나>를 봤다.
아장아장 귀여운 아기 모아나가 바다와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볼 때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아버지 몰래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로 홀로 나아가는 모아나를 보며 전율했다. 익살스러운 반인반신 마우이가 부르는 노래에 어깨를 들썩였고, 불덩이로 변한 여신 테 피티가 다시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 아름다운 섬이 되어 평온히 잠드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받았다.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를 그 영화를, 아이 낳고 키우면서는 완전히 잊다시피 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작은 인간과 24시간 붙어지내는 사람에게 113분의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113초의 틈도 없는 숨 가쁜 일상을 사는 내게, 바다와 음악은 갈수록 존재감을 잃고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이는 곧 두 돌을 앞두고 있었고, 내 일상은 늘 비슷했다.
평일과 다를 것 없는 어느 주말 아침...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아나가 보고 싶다. 모아나를 봐야겠다.’
커피가 마시고 싶다, 한숨 자고 싶다, 지금 똥을 눠야겠다, 와 같은 모아나가 보고 싶다, 모아나를 봐야겠다, 였다. 의식을 넘어선 본능의 영역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간 영상 노출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노력해 온 아이가 조금 마음에 걸렷지만, 그날만큼은 나쁜 엄마가 되어도 될 것 같았다. 그러고 싶었다.
“여보, 나 거실 TV로 지금부터 모아나 볼 거야.”
남편에게 선언하자마자 유튜브에 들어가 영화를 찾아 결제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봤다. 이거 말고 아기 상어 틀어달라고 소리 지르는 아이를 모른 척하고 계속 봤다. 두어 번 할 수 없이 끊어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봤다.
그리고 그날 내게는 오직 한 사람만 눈에 들어왔다. 모아나도 마우이도 테 피티도 아닌 ‘탈라’, 모아나의 할머니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마을의 족장이 되어 섬에 남을지, 가슴이 이끄는 대로 바다로 모험을 떠날지 고민하는 모아나에게 탈라는 훌라를 추며 노래한다.
Moana, that voice inside is who you are.
모아나 네 마음속 그 목소리가 바로 너 자신이란다.
누가 보든 말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든 말든, 바다가 발에 닿을 듯한 암석 위에서 철썩이는 파도와 대화하듯 훌라를 추는 그녀를 보고 있는데... 내 안에서 또 목소리가 들려왔다.
훌라. 훌라. 훌라.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홀린 듯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훌라를 검색했다. 인기 게시물 가장 첫 번째에 올라와 있는 영상에 한 여자가 숲속에서 훌라를 추고 있었다. 그의 프로필에 있는 링크를 타고 들어가 수업 신청을 하고 입금하는데 걸린 시간은 3분도 안 걸린 것 같다.
돌아 보면 모든 게 다 충동적이었다. 한동안 완전히 잊고 지내던 영화를 갑자기 보게 된 것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탈라에게 모든 시선을 빼앗긴 것도. 나와는 평생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 같은 춤을 추겠다고 나선 것도. 겉으로만 보면 다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짓 같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 충동이야말로 바로 그 순간 내 삶에 꼭 필요한 직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에 절대라는 건 절대 없다는 것도. 나는 지금도 여전히 훌라를 추고 있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