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두 리스트(2)

by 김작가

-응, 졸리다. 아메리카노 한 잔하자.
졸업한 지는 4주 정도가 되었고, 졸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언론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준비하고 있는 취업준비를 언론고시라고 호칭하기는 하지만, 남들이 요즘 뭐하고 있냐고 물으면 언론고시라고 대답하지는 않는다. 고시가 아니면서 고시를 붙이는 게 이상하고 사실 언론사도 언론사 나름인데 언론사만 들어가면 ‘우와 언론고시 패스?!’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웃기다. ‘언론사 입사 준비’ 이게 맞는 말이고 언론고시는 틀린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예전부터 꿨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부단히 기자 주변을 얼쩡거리며 살았다. 대학교를 졸업해야 기자를 하지. 그런데 엄마는 잔소리가 심했다. ‘희준이는 취업을 언제 할꼬?’ ‘아직도 기자가?’‘취업은?’세 가지 질문의 순서를 바꿔가며 전화할 때마다 내 상황을 상기시켰다. 엄마의 걱정을 이해하고 곱게 대답하면 될 텐데 나는 항상 논리적으로 쏘아 붙이려 했다. 기자준비생의 폐해라면 폐해다.

카페에서
대학교 주변에 커피 가격이 싼 카페가 많다. 1500은 기본, 프랜차이즈 카페도 학생증을 제시하면 1000원을 할인해준다. 굳이 프랜차이즈 커피를 먹겠다고 다들 가지만 난 프랜차이즈 카페가 싫다. 이방인이 우리 동네에 들어온 것 같다.
-난 프랜차이즈 카페는 싫더라
-알지. 형은 동네카페 좋아하잖아.
-뭐랄까. 획일적인 카페 인테리어에 커피는 안 팔고 허세를 파는 것 같아서.
나의 싫음을 자주 말하는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가 명확해진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구분이 확실해진다. 걔는 싫고, 너는 좋아. 걔의 이런 점은 싫고, 너의 이런 점은 좋아. 이게 어른인가. 이게 어른이 되는 건가. 28살이나 쳐먹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어른이 무엇인지에 대해 쓸데없이 고민하고 있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여자이야기를 했다.
-아 외로워. 소개팅 좀 시켜줘.
-소개팅은 무슨. 형 여자 만날 때야? 취업이나 해 취업.
-그렇지. 취업이 중요하지. 연애가 중요하냐. 저번에 아는 형이 소개팅 시켜준다고 해서 콜했더니 여자 쪽에서 처음엔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 거절했다더라. -왜?
-아직 학생이라고. -세상 더럽네. 취업해야겠네.

우린 여자 얘기를 하려했다가 취업얘기를 하고 나중엔 뒤범벅됐다. 취업준비생에게 여자얘기와 취업얘기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연애를 하면 취업을 해야 하고, 취업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연애를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결국 뒤범벅된다. 연애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은 것도 아닌데, 작년 이맘때만 해도 난 분명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았지만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었다. 확실한 건 2년 전엔 아름다운 연애였다. 작년 이맘때에 헤어졌으니 아름다울 리는 없었다.

난 대외적으로 욕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을 때 욕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욕한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건 간단한 일이다. 그냥, 하지 않으면 된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건 가만히 있으면 계속 생각이 난다. 난 욕을 좋아하지 않고 욕할 생각도 없는데, 머릿속으로는 욕을 한다. 딱히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욕이 난다. 자연발생적이다. 내가 자연발생적으로 욕한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면 쌍방 욕밍아웃해야 되는 사실 때문에 질문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욕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고 상스럽다. 그런데 나는 자연발생적으로 욕을 한다. 이 욕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럼 누가 하는 걸까. 나를 구성하는 게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니. 철학과 출신의 폐해다.

엄마 아빠는 내 앞에서 욕을 한 적이 한번도 없다. 화를 낸 적도 없다. 혼낸 적은 있다. 형이 몰래 학원을 빼먹고 오락실에 갔을 때, 내가 시장에 파는 여자 팬티를 몰래 훔쳤을 때 혼났다. 여자 팬티를 훔친 사건에 대해 설명해보라면 아직까지 기억이 선명해서 대부분은 이야기해줄 수 있다. 햇볕이 강렬했고 전통시장을 지나가다가 주인 없는 옷가게를 봤다. 그리고 아무거나 집었는데 여자 팬티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이 작동해서 교묘히 여자 팬티를 집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든 생각이다. 이 전에도 몇 번 물건을 훔친 적이 있어서 엄마의 파리채로 응징을 당했는데, 여자팬티를 훔쳤을 때는 많이 혼났다. 형이 학원을 빼먹을 때보다 더 많이 맞았다. 값으로만 따지자면 난 돈을 벌었고, 형은 돈을 버렸는데 내가 더 많이 혼났다. 이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은 없지만 엄마의 대쪽 같은 교육방침에 따라 나는 욕하지 않고 담배피지 않고 상당히 도덕적인 인간으로 자랐다.

카페에 있는 동안 석현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보였다. 친한 형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을 자주 겪을 리는 없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평소에 무심코 내뱉던 말들을 지금은 괜찮은지 검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말해. -응?
-그냥 말하라고.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지 말고. -응. 괜찮아?
-괜찮아. 알잖아. 원래 성격이 좀 냉소적이고 운명을 믿잖아. -근데 저번에는 인생은 개척하는 거라며?
-운명을 믿는 것과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상반되는 거라 생각하냐?
-아닌가 그럼?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니까 다르지.
-글세. 내 생각은 다른데. 운명을 믿는다는 건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 같은 거야. 엄마가 돌아가시거나 여자친구가 떠나거나 불가항력적인 힘든 일을 겪을 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운명이라고 믿는 거지. 그런데 모든 일들이 불가항력적이지는 않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난 상존할 수 있다고 봐.
-그 말도 맞네.
석현이는 귀가 열린 사람이다. 석현이랑 유독 친하게 지내고 공부까지 같이 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귀가 열린 사람들은 요즘엔 희귀동물 같다. 머리에 든 게 많아질수록 입이 열리지 귀가 열리지는 않는다. 자신이 아는 세상이 전부인양 크게크게 말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 능력이 얼마나 귀한가. 보기 드문 젊은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렇고 석현이도 그렇다. 나 역시 귀는 열렸다. 그리고 석현이보다 에고가 좀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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