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두 리스트(3)

by 김작가

커피는 매번 맛이 달랐다.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셨지만 어떨 때는 매우 썼고 어떨 때는 텁텁했다. ‘커피 공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맛이 균일하지 않았다. ‘커피 공장’이라는 동네 카페가 생겼을 때 이름 한번 참 무식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공장에서 갓 뽑아낸 것처럼 아메리카노의 가격이 저렴했다. 1000원. 광고에 숱하게 나오는 ‘믿기 힘든 가격’이라는 수식어는 이런 데나 붙일 수 있다. 테이크아웃(순화어로는 포장판매나 포장구매)을 하든 드시고 가시든 무조건 1000원이다. 공장직구의 매력이다.

나란히 카페 테라스에 앉아 오전 11시의 햇볕을 만끽하는데, 이런 날씨에는 도저히 스터디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날씨에 무슨 공부를 한단 말인가.
-오늘은 스터디하지 말자. -잉?
-날씨가 너무 좋잖아. 장례식 치르느라 몸도 피곤하고 맘도 힘들다. -사실 나도 좀 날씨가 너무 좋으니까 쉬고 싶긴했는데. 에이, 학교 안 왔는데 그럼.
-야, 집에 있으면 뭐하냐. 홍대가서 파스타 하나 때리고, 영화 한 편 보고 오자.
-파스타 좋지. 영화는 뭐 볼래?
-아무거나 보자. 시간 맞는 거. 헌혈해서 받는 영화관람권 있어. 오늘은 내가 쏘는 걸로.
-오...고맙긴 한데 그럼 파스타는 내가 사야 되나. -무슨...파스타는 더치.


햇살이 강렬해서 7살 때 여자팬티를 시장에서 훔쳤던 아이는, 수십년이 흘러서도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다. 날씨가 좋아서 이 날 공부를 하지 않는다. 희준은 주로 제안한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희준의 특징은 대체로 공통적이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하다. 명확해서 좋은 점은 굳이 묻지 않아도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물하느라 골치아픈 일이 없어서 좋다는 게 친구들의 중론이다. 취향의 선명함처럼 희준의 생각도 뚜렷하다. 좋고 싫음이 명확하다. 독특한 게 가끔 받아들이기 힘들 때는 있다. 예를 들면 복장에 관한 그의 입장이다.

-남자는 왜 치마를 못 입지?
-글쎄다, 안 이쁘잖아. - 안 이쁜 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거고, 예전 유럽 사람들은 치마 입고 다녔잖아.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도 치마고. 길거리에 다니다보면 여자들은 다 옷이 달라. 물론 패션은 비슷비슷해보이지만 옷가게에 걸린 옷들만 보면 여자들의 선택폭은 넓은데 비해, 남자들은 없어, 너무 부족해.
-그래서 뭐 치마라고 입겠다고?
-그냥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패션이 진일보해서 남녀패션차별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뭐 이런 식이다. 희준의 친구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아...’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언론고시스터디를 많이 해서 그런지 세상을 보는 눈이 살갑지만은 않아 보인다. 삐뚤어졌다고 말하기엔 과하지만 삐뚤어졌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희준의 주변 사람들은 석현과 희준이 몇 년 사이에 부쩍 친해졌다는 걸 잘 안다. 둘이 동성애자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희준은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마초적인 생각을 가졌고, 석현은 자유롭게 사는 걸 좋아하며 귀가 열렸다. 그러니 둘이 친한 것도 이상한 건 아닌 셈이다.

홍대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합정역을 지나 홍대역 앞에 내렸다. 얼마 전 TV를 보다가 홍대가 지역이름인줄 알고있었다라고 말하며 깜짝 놀라는 연예인이 있었다. 나도 그 연예인이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겠지만 홍대는 홍익대학교가 있어서 홍대다. 홍대역에서 내려 대학교까지 걸어가는데 오래 걸리지만 어쨌건 홍대역이다. 우리가 홍대라고 부르는 이 동네는 동교동, 서교동을 가리키며 넓게는 합정동이나 상수동도 포함하기도 한다. 하지만 합정동, 상수동까지 포함하면 지역이 너무 넓어지므로 웬만하면 홍대, 합정, 상수는 구분하는 게 좋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요즘 뜨는 곳이라는 연남동 역시 홍대 바로 옆에 있는데 홍대, 합정조차 구분하지 않느다면 연남까지 포함해야 하냔 말이다. 서교동과 동교동 일부만 포함하는 걸로 해야겠다. 누군가 나에게 홍대가 어디에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난 동교동 일부와 서교동에 걸쳐있다고 말해야겠다.

셔틀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렸다. 석현이는 일단 영화부터 예매하자고 했다. 좋은 생각이다. 영화관으로 갔다. 월요일 오후 영화관에는 과연 사람이 많이 없었다. 아무리 개강을 했다고 해도 월요일엔 과연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해외 히어로물 한 편이 눈에 띄었고 한국 유명 배우가 나오는 국내영화 한 편이 보였다. ‘잘나가는 영화는 볼 기회가 많을 테니까 독립스러운 영화를 봐야겠다’ <어라이벌>이라는 영화가 보였다. 3시간 뒤에 한번, 밤 11시 10분에 한번 상영하는 영화다. 포스터에 인물은 없고 파도가 빠져나간 모래사장에 맥주병 하나, 사람 발자국 하나가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편지를 보냈다’라는 문구가 섬뜩하면서 내 상황이랑 비슷하다 느껴졌다. 물론 돌아가신 부모님이 편지를 보낸다는 설정이 기괴하고 이상해보였다. 그래도 운명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고, 해외영화제에서 노미네이트된 영화라고 한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thy님 ‘내 인생 최고의 영화!’ -**reg님 따위의 추천이 아닌 믿을 만한 영화제에 노미네이트됐다니 믿음이 갔다.
-<어라이벌>, 이거 볼래?
-처음 듣는 영화네. 재밌어 이거?
-나야 안 봐서 모르지. 포스터가 느낌 있잖아.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는데 돈 버릴 거 같지는 않은데. -그래, 그거 보자 그럼. 시간도 딱 맞네. 3시간 뒤네. 밥 천천히 먹고 좀 걷다가 천천히 다시 오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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