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두 리스트(4)

by 김작가

홍대역 부근에서 노는 일은 좀처럼 없다. 2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와 추억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예전 여자친구 생각에 괴로워서 오지 않는 건 더더욱 아니다. 괴로움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홍대로 가는 게 싫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둘이 쌓아놓았던 흔적들이 주변에 너무 많이 흩뿌려져있었다. 그래서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추억들과 부딪쳤다. 그게 괴로워서 홍대역이 아닌 합정역으로 자연스레 자주 가게 됐다. 합정역은 홍대역보다 사람이 붐비지 않고, 프랜차이즈 가게는 더 없으며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다. 지금 홍대역이 아닌 합정과 상수를 가는 이유는 그곳이 물론 더 좋아서이지만, 처음 오게 된 계기는 생각해보면 구여친 때문인 셈이다.

-형, 밥은 어디서 먹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파스타 먹자. 파스타 먹기로 했는데, 파스타 먹어야지. 저번에 친구랑 ‘더 테이블’이라는 곳에서 크림파스타 먹었는데 맛있더라. 거기 가자. -그래, 좋아

누구와 밥을 먹건 메뉴를 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모두가 선택장애라면 갈팡질팡할 테지만, 난 메뉴를 정할 때 누구보다 더 빠르다. 일단 내가 메뉴를 던진다. “파스타 먹을래?” 글머 상대방이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말한다. 싫다거나 모르겠다고 대답하더라도 고민할 것 없다. 합정동 부근에 맛집은 종류별로 다섯 개 정도 던지면 그 중에 하나는 끌리게 되어 있다. 난 특정한 한 메뉴를 먹어야만 되는 것이 아니기에 5개 중에 아무것이나 골라도 70%이상 만족한다.

아버지는 1년 사이에 서울에 두 번 올라오셨다. 첫 번째는 사촌누나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지은인지 은지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촌누나는 내 기억 속에서 한참이나 잠행하고 있던 사람이다.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하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 기억을 제외하면 다른 기억은 없다. 사촌 누나는 내가 무지 어렸을 때 침대에 재우며 볼에 뽀뽀를 해주곤 했다. 아니 기억을 더듬어보니 여러번이 아니라 한번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의 기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그만큼 기분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안은 무뚝뚝하다. 스킨십이나 감정표현에 서툴다. 어쩌면 다들 서로 좋아하지 않는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도 해봤다. 속에 있는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감정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사촌누나의 볼뽀뽀는 선명하게 남아서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만 기억이 난다. 그런 누나가 결혼을 했고, 난 이름도 헷갈린다. 그 누나의 결혼식 때문에 아버지는 차를 몰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뭐 한다고 다 튀어나와가지고...” 길거리의 사람들을 보고 한 말이다. ‘아버지도 튀어나왔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튀어나온다는 말이 참 예의없는 것 같아서 생각만 하다가 말았다. 튀어나오다말고 다른 표현을 써볼까 생각했지만 단어를 바꿔버리면 아버지의 말과 운율이 맞지 않을 것 같아 생각을 접었다. 가끔씩 홍대에 올 때 드는 느낌이 그렇다.

‘뭐 한다고 다 튀어나왔을까 이 사람들은...’

더 테이블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실제로 걸은 건 10분 정도 밖에 안 됐지만 사람들이 많아서였을까 길게 느껴졌다. 길거리의 사람들이 잘못한 건 없었으나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귀찮고 원망하고 싶었다. 커플티르 입고 커플신발을 신은 한 커플이 꼴뵈기 싫었다. 너희들도 언젠가는 헤어질거야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얘기는 삼키면 삼킬수록 소인배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맘 맞는 사람과 꾸준히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 속에서 옳아터지기 전에 말이다. 지나가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몸에서 시선을 뗄 수 없다가도 너무 헤프게 입었다며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 이러다가 난 또 쓰레기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들은 순서를 매길 틈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흰색바지를 입은 한 여인의 몸매에 감탄을 하다가 붕대를 감아놓은 미라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참 이상한 생각이라고 속으로 말한다. 검은 스타킹을 입은 예쁜 다리의 여자를 보고서는 섹시하다고 생각하다가 스타킹의 보온효과에 대해 생각하다가 왜 맨다리보다 검은색 스타킹이 더 섹시한가에 대해 생각한다. 홍대에서 더 테이블까지 가는 길 위에서 나는 이런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한다.


더 테이블에 도착하고 크림파스타 하나와 토마토스파게티를 시켰다. 파스타를 먹는 남자 두 명을 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시선이 싫다. 남자들은 배만 부르면 다 처먹는 그런 사람들인 줄 안다. 만약 파스타맛 라면 같은 게 있었다면 그걸 사먹을 수도 있겠지만, 크림파스타는 대체재가 없다. 신라면이 없으면 안성탕면을 먹는 것처럼 대체할 수 없다.
-형 근데 와우뉴스에서 일했던 건 월급 따로 안 줬지? -응 안 줬지 며칠 안 했으니까.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난 와우뉴스라는 인터넷 연예 매체에서 이틀 일했다. 와우뉴스는 정말 와우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근데 거기 꽤 잘나가는 곳이라며? 연예부 기자 하고 싶다고 했잖아.
연예부 기자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영화 전문 기자가 하고 싶은 거라고 숱하게 말해왔지만, 내 고민의 크기는 남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전달하는 과정에서 축소되고 변형되어서 결과적으로 왜곡되는 일들이 잦다. 내 꿈이 연예부 기자가 된 건 축소왜곡한 석현이 덕분이다.
-연예부 기자가 꿈이 아니라, 영화 전문 기자가 꿈인데, 영화 전문 매체가 너무 부족하니까 일단 연예 매체 영화부에서 경험을 쌓으려고 들어갔지. 그런데 생각보다 취재환경이랄까, 연예 매체가 하는 일을 보니까 기자를 꿈꿨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더라고. 그래서 관뒀지.
-아, 영화 전문 기자였구나. 기자를 꿈꿨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야?

답답하다. 일일이 설명해주는 게 너무 답답하다. 그래도 난 참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게 당연하지만 답답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철썩 같이 잘 알아들으면 좋으련만 그런 사람이 어디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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