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석동은 내가 사는 동네이면서 전 여친이 사는 동네이기도 하다. 우린 같은 동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다가 만났다. 헤어지고 일 년 사이에 동네에서 만날 법도 했지만 여지껏 그런 적이 없었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행스럽기는 하다. 지나가다가 만나는 거였다면 많이 어색해서 몸둘바를 몰랐을 게다. 흑석동 삼거리는 누가 뭐래도 흑석동의 중심가다. 흑석동에는 흑석시장도 있고 중앙대학교도 있고 먹자골목도 있지만 그 중앙에는 흑석동 삼거리가 있다. 흑석동 삼거리를 중심으로 중앙대, 중앙대 병원, 이마트, 흑석역, 흑석시장이 에워싼 형태다. 그렇다고 흑석동 삼거리가 핫플레이스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다. 삼거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겨울이 되면 군고구마와 군밤을 파는 아저씨와 녹차호떡을 파는 아주머니는 있지만, 그곳은 중심가일 뿐 번화가는 아니다. 그래도 삼거리와 여러 개의 횡단보도 그리고 삼거리의 중심에 놓인 커다란 검은 돌은 이 동네의 상징이다. 검은 돌에는 '옛부터 흑석동에는 검은 돌이 많았으며...'으로 시작하는 문구가 새겨져있다. 그런 돌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주민들이 대다수지만 나만은 동네주민으로서 그 검은 돌을 볼 때마다 애동심이 고취되고는 한다. 흑석동을 사랑하는 이유는 없지만, 몇 년 살았다고 정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네 시 오십 분에 흑석동 삼거리에 전 여친이 도착했다. 이름은 김애니, 나이는 24살이다. 그렇다. 첫번째 소개팅을 했던 여자와 동갑이다. 이름은 본명이다. 할머니가 외국에서 살다오셨는데 그때 이름이 애니였다고 말해줬다. 할머니가 외국 어디에서 살았는지 교포인건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애니가 나에게 설명을 해줬는데 기억을 못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말해준 적 없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애니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1분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을 줬다. 그 정도로 시간관념이 철저한 애였다. 그래서 늦는 사람을 싫어했다. 다행히 시간 약속을 철저히 하자는 신조는 나 역시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늦게 온 상대방을 탓하며 싸우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오빠 일찍 왔네."
"응. 너 살 많이 빠졌다."
"빠지긴 초췌한거지. 일이 힘들어서 그래."
"그래 그럼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애니는 갑자기 웬일로 연락했을까 궁금했다고 얘기를 꺼냈다. 치킨이 먹고 싶어서 연락했다는 내 말을 듣고 황당하지만 이해한다고도 말하며 웃었다. 리얼후라이치킨은 충분히 그럴 만한 곳이라고도 말했다. 가끔 치킨맛이 생각나서 연락을 할까했지만 바쁜데 방해하는 걸까봐 안 했다고 했다. 리얼후라이치킨은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동네치킨이지만 매장인테리어나 간판은 여느 프랜차이즈 치킨집에 버금간다. 아니 그 이상이라 해도 이상할 것 없다. 매장인테리어나 간판 디자인은 둘째치고 이곳은 치킨맛이 환상적이었다. 특히, 양념치킨은 고추장소스에 오미자인지 뭔가를 많이 넣었는데 가격은 16000원으로 대학가 치킨집과 비교해 비싼 편에 속했지만 양도 더 많았고 맛도 더 있었다.
"그래서 요즘 무슨 인턴하는거야?"
"IT기업에서 마케팅 인턴하는 건데, 마케팅 쪽이 역시 빡세. 미팅이 얼마나 많은지"
전공이 경영학이라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어했는데, 마케팅 인턴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뿌듯했다. 애니는 배움에 대한 욕구가 큰 사람이었다.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다른 학문에 대해 배우는 걸 특히 좋아했다. 타 전공 1학년 수업 듣는 게 취미였는데, 물론 학점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중국어, 역사학 등 관심사가 너무 넓어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전공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에 전공 학점은 언제나 잘 나왔다. 능력자였다.
"오빠는 요즘 뭐해?"
"난 4학년이라 취업준비하지"
"아 그렇겠네, 인턴도 저번에 했고, 대외활동도 많이 했고, 토익 점수는 땄어?"
"이제 토익만 남아서, 토익 공부하면서 마지막 학점관리 해야지."
"오빠는 잘 할 거야. 워낙 계획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잖아. 플랜맨이니까."
애니는 플랜맨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특유의 눈웃음을 보였다. 나 역시도 애니만큼이나 배움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굳이 구분하자면 배움에 대한 욕심보다는 성취에 대한 욕심이었다. 뭔가를 시도하는 것보다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이었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우선했다. 그래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과정을 즐기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이유가 떠올랐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해 헤어졌지만, 어떻게 하다가 권태기를 겪에 됐는가를 생각해보자면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만남에 대한 지겨움 이전에 난 애니를 장애물로 생각하곤 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 애니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뒷전이고 카페에 가서는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다. 카페에서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가끔씩 귓가를 때리는 날카로운 소음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자주 반복됐다. 난 공부를 하려하고 쉽게 예민해지고 화가 나 있었다. 난 집에 일찍 가고 나 때문에 공부할 거리는 챙겨온 애니 역시 일찍 가야 했다. 난 모든 기념일을 챙겼고, 선물뿐만 아니라 편지를 써서 줬다. 매일같이 집에 바래다 줬다. 그런데 난 그런 쉽고 단순한 일들로 평소의 나의 행동들을 덮으려고 했다. 애니를 만나는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애니가 장애물로 보였다. 친구와 만나 술을 마시는 날이면 답장을 하지 않았고, 일부러 늦게 하는 일들도 잦아졌다. 눈 앞에 애니를 두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리가 왜 헤어졌어야 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선명해졌다. 아름답게만 포장되어서 반짝거리던 기억들보다 더 선명해졌다.
우리는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500cc 한 잔씩만 마셨다. 애니는 오랜만에 나를 만나 즐거워보였고 종종 연락하라고도 말했다. 난 즐겁게 놀았지만 다시 연락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지금의 애니를 행복하게 하고 있는 새로운 남자친구를 떠올렸다. 내가 준 상처를 그 사람이 치료해줬구나. 애니는 많이 행복해보였다. 여유로움과 행복함이 나 때문도, 치킨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흑석동 삼거리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일년 전에도 삼거리에서 헤어졌고, 오늘도 그랬다. 일년 전에 애니에게 그만만나자고 말했을 때, 애니는 울음을 참았다. 짐작했던 이별이었지만 감당하기엔 둘은 많이 가까웠다. 힘겹게 헤어졌던 애니의 발걸음은 오늘은 가벼워보였다. 우리는 또 그렇게 삼거리에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