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셨다. 선희는 술을 센 사람이었다. 각 일 병씩 마셨으나 얼굴만 조금 빨개질 뿐 혀가 꼬이거나 비틀대지 않았다. 아무리 술이 안 취해도 벌써 새벽 1시인데 같이 있어도 되는 걸까. 소개팅인데 모텔을 가는 건 무례한거라 생각했다. 계산은 선희가 했고, 우리는 식당을 나왔다. 선희는 걷고싶다며 사람들이 많이 없는 골목길을 가리켰다. 몇몇 커플들과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만 있는 그 골목길을 걸으며 선희는 조금 비틀거렸다. 아까는 분명 멀쩡해보였는데 지금은 누가봐도 취해보였다. 취기라는 게 아무리 갑자기 온다지만 이럴 수도 있구나 싶었다. 선희는 내게 팔짱을 꼈다. 난 취해서 나에게 많이 의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팔을 꽉 잡을 수 있게 선희의 손을 내 팔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한 순간 아이스크림은 누가 계산해야 할까를 떠올린 내가 쪼잔한 걸까. 편의점 아이스크림은 꽤 비싸다. 두 명인데 돈 아끼자고 2+1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근처에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빵빠레 하나와 월드콘 하나를 샀다. 돈은 3000원 가까이 나왔고 계산은 선희가 했다. 아이스크림을 올리기도 전에 선희는 지갑을 꺼내고 있었는데 누가 계산할까 따위를 생각한 내가 조금 한심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직장 상사를 욕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큰 도로가 나왔다. 택시들이 많이 보였다. 난 선희를 보냈다. 그녀의 취기를 의심하지 않았다. 또 첫 만남에 키스를 하거나, 모텔에 갈 만큼 날라리가 아니다. 집에 가면 연락하라는 말을 하며 그녀를 보냈다.
'나 댤 도탁ㄷ했언'
선희는 잘 도착했다고 카톡을 보내고 이후로 다른 말은 없었다. 오랜만에 스킨십이라 기분이 좋았다. 내게 팔짱을 꼈을 때 그 느낌과 분위기를 떠올리며 나도 불을 끄고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냐는 카톡을 시작으로 몇번의 대화를 했다.
그 다음날, 일요일인데 뭐하냐는 카톡을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으나 선희는 생각보다 답장을 빨리하지 않았다.
월요일은 카톡을 하지 않았다.
화요일에 카톡을 했고 6시간 뒤에 답장이 왔다. 이번주에 볼 수 없냐고 물어봤으나 주말에 바쁘다고 했다. 밀당을 심하게 한다는 느낌이 왔다.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 이번주에는 시간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이번주에도 바쁘다고 했다. 이후로도 몇번의 카톡을 했지만 6시간 뒤에 카톡이 오거나 다음 날 카톡이 왔다. 이럴 때 주선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어서 알바형에게 혹시 선희가 소개팅에 대해 어땠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물어봤지만 아무런 얘기 안 했다고 대답했다. 소개팅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대화가 잘 통했는데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마침내 선희는 '퇴근했어?ㅎㅎ'라고 묻는 나의 카톡에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선희와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필요가 있는지 애매한 말에 대해 답장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질문에 대해 읽고 씹는 행위를 해석하기란 어렵지 않다. 너와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
구여친과 헤어지고 두 번째 소개팅은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도대체 뭘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실패 이유를 알아야 실패를 번복할 수 있다.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는 힘드니 여자사람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답은 두 가지로 분류됐다. '너랑 자려고 했는데 네가 눈치없이 택시 태워보냈다'라는 응답이 1위, '놀았을 때는 좋았는데, 술 깨고 생각해보니 학생과 만날 자신이 없어서'가 2위다. 키가 작아서 앉아있을 때가 좋았다라는 응답도 1명 있었다. 물론 내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왜 1시까지 나와 술을 마셨으며 왜 내게 스킨십을 했을까. 여전히 의문부호가 떠나질 않는다. 정말 언젠가는 꼭 물어보고 싶다. 이걸 모르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두 번의 소개팅이 끝나고 난 더 외로워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더' 외로워진 게 아니라 없었던 외로움이 생겼다. 소개팅을 하기 전에는 난 외롭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다. 난 봄날에 어울리는 핑크빛 사랑을 꿈꿨고, 누구든 만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소개팅 상대들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들이 가진 기준에 내가 걸맞지 않았다. 운명을 믿었지만, 운명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 소개팅을 하는 건 힘들었다. 체력적 소모보다는 심리적인 소모가 컸다. 일 년 간의 애도가 끝나도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외로움'을 알았을 뿐. 그러다 문득 난 구여친과 왜 헤어진걸까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왜 헤어졌던걸까?'
그에 대한 대답을 하는데 일초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권태기로 헤어졌다. 서로에 대한 권태가 아닌 일방적인 권태에 의해 헤어졌다. 우리는 매일같이 만났고, 난 어느날 이런 만남이 지겹다고 느꼈었다. 지겨움을 느껴버린 나는 지겨움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그것이 머리에서부터 커졌는지 심장에서부터 커졌는지 모르지만 점점 커져만 가서 결국 입 밖으로 나오게 됐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지겨움이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나오면서 '그만 만나자'라는 문장으로 바꼈다. 이별을 예감한 여자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마 내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먼저 말했을 게다. 만남을 지겨워하는 모습을 매일 같이 보며, 더 이상 웃지 않는 모습을 보며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싸워서 헤어지지도 않았고, 취향이 달라서 헤어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매일 만날 만큼 서로가 좋았고 함께 하는 게 즐거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좋지 않았고, 모든 게 즐겁지 않았다.
헤어진 여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갑자기 생긴 외로움 때문에 보고 싶었던 건 아니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어떻게 지내는지 잘 지내는지 보고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 친구와 내가 헤어질 땐 우린 분명 서로 웃지 않았지만, 우린 누구보다 사이가 좋았던 커플이었다. 그 때가 생각났다. 한 시도 떨어지기 싫어했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새 힘들었던, 힘들게 하던 시절은 시간 속에 스러지고 아름답던 기억만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이런 몹쓸 생각으로 카톡을 보냈다.
'요즘 뭐해?'
요즘 뭐해는 아주 적절했다. '뭐해'라는 말이 썸남과 썸녀 사이에 썸관계를 공식화하는 질문이 되어버린 시대에서 요즘 뭐하냐는 말은 일반적인 질문이다.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에게 할 만한 그런 질문. 답장은 바로 왔다.
'오빠 오랜만. 나 요즘 인턴해유'
그랬다. 전 여친은 말끝마다 유를 붙였다. 이유는 없다. 왠지 귀여워서가 아닐까. 참고로 그녀는 서울 토박이다.
'아 인턴하는구나. 아니 예전에 리얼후라이치킨 갔었잖아. 요즘 그 치킨맛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 겸 같이 갈까 했지'
'아 오키오키 좋아. 평일엔 바쁘니까 토요일 한 다섯시쯤에 보자'
'응ㅎㅎ'
애도기를 가지고 내 기억속에서 죽여버렸는데, 나도 모르게 연락을 하고 이미 약속까지 잡았다. 그래 뭐,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대화가 잘 통했으니까. 오랜만에 서로 안부나 물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