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3)

by 김작가


주말에는 학교 근처에 있는 이디야 카페에서 알바를 한다. 손님이 워낙 많아서 같이 알바를 하는 형과 친해질 시간이 없을 줄 알았지만, 어쩌다보니 친해지게 됐다. 이 형에게도 소개팅 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형, 저 소개팅 좀 시켜주세요"
"소개팅? 너 저번엔 안 한다며?"
"이제 하려구요. 전 여친이랑 헤어진지 꽤 시간이 지났으니까 이제 해도 될 거 같아요"
"그래 그래. 소개팅. 시켜줄 수는 있는데, 내 친구들이니까 너보다 연상이라, 괜찮냐?"
"연상, 상관없어요. 전에 연상이랑 사귄 적 있어요" 사실이다. 2주 사귀고 헤어졌지만.
"그래 그럼 내가 연락줄게. 주변에 물어보고"
"네, 형"

나만큼이나 키가 작고, 얼굴이 순해보이는 이 형은 나와 같이 알바한 지 3개월 정도 됐다. 대학원생인데 마냥 집에서 용돈 받아쓰는 게 미안해서 용돈은 조금 받고 알바로 생활비의 대부분을 마련한다고 한다. 대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이 형의 순한 얼굴과 부모님의 난감한 표정이 겹쳤다. '저 대학원에서 공부 더 하고 싶어요'라고 말한 순간 흘렀던 정적을 어떻게 견뎠을까. 부모님의 휘는 허리와 흰 머리를 보고도 대학원에 가고 싶을 만큼 용기가 있었던걸까. 아니면, 이기적이었던걸가. 그 형과 사적이고 깊은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강단있는 사람인지 부모에게는 어떤 사람인지 친구들에게는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주말마다 나와 앞치마를 메는 모습을 보고, 쓰레받이를 들고 여기저기 청소하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그런 상상이 된다. 그리고 이미 4학년인 내가 1년 사이에 생각이 바껴서 대학원에 가고 싶어지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가 닿는다. 만약 정말 가고 싶게 되면 난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알바형은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일요일에 내게 연락처를 줬다. 자신과 동갑, 그러니까 나보다 두 살이 많은 여자. 어엿한 직장인으로 빌딩숲에 켜진 불빛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운명이 있다고 믿어서일까, 누가 어떤 조건이든 개의치 않는다. 될 사람은 되고 안 될 사람은 안 된다고 밥먹듯 생각하며 살았다. 또한 만남도 이루어질 만남은 이루어진다고 지금도 믿어의심치 않는다. 결과가 무엇이 나오든 합리화시켜버리는 '운명'이라는 최종무기는 어쩌면 나를 게으르게 만들 수도 있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을 '이게 운명이었네'라는 말로 눙쳐버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최소한 인연에 있어서는 난 운명이 분명있다고 믿는다. 노력해도 발전이 없는 관계, 노력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관계들을 숱하게 봐왔으니까. 사랑같은 건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대표적 분야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면 운명이라 믿는 게 속편하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직장인이라 해도 못 사귈 이유는 없다.

'안녕하세요. 선희씨. 소개팅하기로 했던 이라고 해요.'
'아 네 안녕하세요^^'
'소개팅 날짜를 잡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금요일 저녁이 낫겠죠?'
'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좋아요. 장소는 어디가 괜찮으세요? 주로 어디서 노세요?'
'저는 합정 홍대 이 부근에서ㅎㅎㅎ'
'아 그런 합정에서 봐요. 직장은 강남인데 집이 그쪽이라'
'그럼 다음 주 금요일 저녁 합정으로?'
'넵^^'

한 차례 실패를 겪고 난 다짐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멋있을 거야. 정말 얼굴도 괜찮고 건강한 생각을 가졌으며 미래가 창창한 남자가 FA시장에 나왔는데 도대체 왜.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을거야. 아마 잘 될거야. 내가 잘 안 되면 누가 잘 되겠어. 날 안 만나면 누굴 만나겠어. 없는 자신감들을 끌어모았다. 가만, 그런데 그 선희라는 사람은 나이가 29살. 아마 결혼을 생각할 텐데. 난 아직 결혼은 모르겠지만 만나보고 결정하면 되지. 이쯤 생각하니 스스로가 웃겼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머릿 속에 떠올렸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부끄러웠다.

금요일, 두 번째 소개팅
또 합정역이다. 연이은 소개팅, 연이은 합정역. 그런데 선희씨가 돈을 버니까, 저녁을 사려나. 아님 그래도 내가 남자니까 내가 사야하나. 웬만하면 내가 사야겠지. 돈을 어떻게 낼지에 대해 혼자 생각하는 사이 선희씨가 도착했다. 우린 또 오꼬노미야끼를 먹으러 갔다. 블로그 포스팅한 걸 우려먹으려고 온 게 아니다. 저번 소개팅에서 블로그 이벤트를 한번 썼기 때문에 또 쓸 수는 없다. 가격대가 저렴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곳이기 때문에 왔다. 앞으로도 소개팅할 일이 있으면 무조건 여기로 와야겠다. 정갈하다 정갈해.

"여기 와본적 있어요?"
"아니요. 합정 부근에 맛집 많이 아는데도 여기는 처음이에요"

물론 믿을 수 없다. 집이 합정이고 나이가 29살인데 여기를 모를리가. 여긴 꽤 유명한 맛집이라고. 게다가 오꼬노미야끼를 파는 곳이 그렇게 많이 않다고. 소개팅남에 대한 배려가 있는 여자라고 느꼈다.

"소개팅이기는 하지만, 불금인데 맥주 한 잔 어때요?"
"좋죠.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선희씨는 귀엽고도 성숙한 외모를 지녔다. 귀여운 외모는 본래 그의 외모이고 성숙한 건 나이가 듦에 따라 생긴 매력일 것이다. 귀여움과 성숙함이 서로 조화롭게 있는 나이가 29살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랑 두 살 차이니까 나이 차이가 심한 것도 아니고 잘 맞을 것 같았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우린 맥주를 한 잔씩 마시며 야끼소바와 오꼬노미야끼를 먹었다. 저번에 만났던 정민이와 대화와 분위기를 떠올리며 선희씨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다. 직장인이기 때문일까, 나보다 연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퇴근해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선희씨는 내 말에 잘 웃어주고 심지어는 대화를 주도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보통 소개팅에서 여자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가 1학년 때는 그랬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그랬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있는 여자는 분명 다르다.

난 원래 저녁을 먹고 디저트를 먹으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술을 한 잔 마신 이 여자는 내게 2차를 제안했다. 2차? 전혀 생각치 못한 코스다. 우리의 대화가 꽤 재미있었나보다. 그래 좋아 2차 가는 거야. 난 내가 알고 있는 제주도 음식을 파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고 그녀는 좋다고 했다. 여기도 처음이라고 했다. 이것도 역시 그냥 하는 말이겠지. 그럴지라도 새로운 맛집을 알려준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 사람도 좋아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취향을 공유한다는 감정, 이런 느낌 오랜만이다. 우린 야외테라스에서 한라소주와 몸국을 시켜먹었다. 몸국은 매생이국과 비슷한 국으로 고기가 들어간 제주토속음식이다. 두 세 번 먹으면 익숙해지는 맛이지만 처음 먹으면 누구나 그 맛에 반한다. 선희씨 역시 그랬다. 진짜 맛있다고, 술이 쭉쭉 들어간다고 열심히 감상평을 하는 그녀는 벌써 내게 말을 놨다. 나도 놨다. 편하게 이름을 불렀다. 서로 정말 편하게 술을 먹고 과거에 대해 이야기했다. 과거는 얼마든지 이야기해 줄 수 있는데 과거의 연애까지 물을 때는 좀 곤란했다. 소개팅에 나와서 지나간 여자 얘기하는 건 무슨 상황일까. 난 끝까지 얘기해주지 않았다. 알아서 좋을 게 없는 게 사귀는 사람의 과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지 않으니 선희도 말하지 않았다. 서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난 그게 좋았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건 지금까지의 과거였으나, 소개팅자리에서 과거의 나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지나간 연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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