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치르는 재미
어릴 적 엄마는 ‘글씨 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반듯한 자세로 앉는 법, 올바르게 연필을 잡고 정확한 순서에 맞게 글씨를 쓰는 것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꽤 오랜 기간 동안 서예 학원을 다녔고, 사각 칸이 그려진 노트에 비율을 맞춰 글씨 쓰는 연습을 해야했습니다. 글씨 연습은 꽤 좀이 쑤시는 작업이라 당시엔 매우 힘들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덕분에 저는 꽤 나쁘지 않은 서체를 갖게 됐고, 글씨는 그 사람을 보여준다는 엄마의 교육 방향도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채에 둘 마땅한 방명록을 찾다가 서촌에서 원고지 형태의 메모지를 발견했습니다. 일단 한옥인 우리 집과 원고지가 시각적으로 잘 어울렸습니다. 원고지에 글 쓸 일이 별로 없는 요즘 한국 손님들은 물론, 원고지를 처음 보는 외국인 손님들도 재밌게 느끼실 것 같았습니다.
손님 퇴실 후 가장 먼저 방명록을 봅니다. 결이네 사랑채에 대해 어떤 코멘트를 남기셨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어떤 글씨, 어떤 형태로 글을 남기셨을지도 궁금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서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몇몇 글씨가 있습니다. 울산에서 오신 손님의 글씨가 그랬습니다. 살짝 길게 내린 명조체.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던 손님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직업이 꼭 선생님일 것 같은 그런 글씨다.
타인을 감동시키는 글씨는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키보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대에 수려한 글씨를 보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원고지 방명록에 멋진 필체가 남겨져 있으면 좋은 후기를 열 배쯤 더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멋진 필체와 함께 나를 또 감동케 한 방명록이 있는데, 글씨만 보면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외국인 손님들의 글씨입니다. 알파벳과 한글은 각각 기준선이 다르죠. 알파벳은 위아래로 나뉘어 아랫부분이 기준인데 반해, 한글은 기준선이 다양합니다. 초성과 중성으로만 이뤄진 글자, 초성, 중성, 종성으로 이뤄진 글자, 가로 쓰기 중성과 세로 쓰기 중성이 결합된 글자...어릴 때 배운 사각형 칸을 예로 든다면, 사사분면 모두 적당한 비율과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한국인인 우리도 그 비율을 멋들어지게 맞춰 가독성 좋게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은데, 애초에 다른 기준선으로 글씨 쓰는 연습을 해온 외국인이 한글까지 보기 좋게 써놓은 걸 보며 ‘한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시구나’라고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한글을 배우고 또 정성스럽게 글씨를 써준 외국인 손님들이 참 고맙습니다.
*캐나다에서 온 제시카의 방명록, 귀여운 그녀의 글씨체와 정확한 띄어쓰기, 맞춤법. 완벽하다!!
주소를 받아 둘 걸. 오늘은 왠지 나도 박시환, 제시카 님에게 손편지를 보내고 싶은 날입니다.
“당신의 글씨가 생각나요. 그날 나에게 용기를 주고 나를 기쁘게 했던 당신의 글씨.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싶어요. 서울엔 또 여행을 왔는지, 당신의 일상은 평안한지. 단정하고 밝은 기운을 가진 당신의 그 글씨처럼, 오늘 하루도 고요하고 행복하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