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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윤 Mar 21. 2024

만 34.5세 나를 소개하자면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나의 시간들 그리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요즘

<나의 10대 : 부족하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그 어려운 평범했던 나의 삶>

2021년까지의 나는 그 누구보다 평범하고 평탄하게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 중 하나였다.

1989년 부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께서 아파트를 분양받으며

1995년 11월 인천으로 터를 옮기게 되었다.


전업주부셨던 엄마 덕분에 적절한 모든 케어를 받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2002년 월드컵이 난리였던 해에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무난하게 별탈없이 3년을 보냈던 것 같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많지 않은 친구들이 선택했던 고등학교를 지망하여 입학하고

운이 좋게 입학 시험 비슷한 모의고사를 잘 치뤄

반별로 몇 명만 따로 모아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는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 좀 하나...? 하는 생각도 잠시

나의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지만

나름 끈질김과 성실함으로 가득찼던 19살 고3시절에 다시 성적을 올려 

그래도 엄마, 아빠가 잘 아는 그런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나의 20대 : 자유와 방탕 그 중간의 어디쯤>

2008년 대학교에 입학하여 술이란 이런 것이다를

반년 동안 느끼며 평생 먹을 술을 다 먹어가며 잊지 못할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

나머지 3년을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방식으로

지난 날의 방탕함을 후회하며 보냈던 것 같다.

1학년 때 깎아먹은 성적을 봐줄 만한 성적으로 올리느라 4학년 때는 꽤나 고생했다.

그래도 우리 딸이 알만한 대학에 들어갔다는 걸 자부심으로 느끼신 부모님 덕분에

등록금과 용돈 걱정없이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당연히 대기업에 갈 줄 알았던 건방진 생각과는 다르게

면접에서 떨어지고 서류에서 광탈하며 현실의 쓴 맛을 느꼈던 24살이다.

취업 시장과 대학교 4년동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를 반성하며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나름 대기업의 패션 현장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느끼지 못했을 모든 감정을 압축하여 느낄 수 있었던 근무 환경.

그래도 사회란 이런 곳이구나를 경험했고,

나름 기싸움이 만연하던 곳에서 어린 나이에

그것도 여자인 내가,

여러 시선에 지지 않고 잘 해냈던,

지금까지의 삶에서 몇 안되는 자랑거리이다.


3년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첫 번째 회사생활을 잠시 접고

2016년 갑작스럽게 캐나다 어학연수의 길에 올랐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핑계거리를 찾다가

공부만큼 그럴싸할 게 없을 것 같아 급하게 만든 계획이다.


이왕이면 캐나다에서 남자친구도 만들고 결혼도해서 눌러 앉는 계획도 야무지게 세워놓고 떠났지만

현실은 과연...

영어는 문법과 단어만 쓸데없이 많이 알고 있고

입 밖으로 내뱉을 용기조차 없던 나는

혼자사는 것도 처음인지라 나와의 싸움에 한 달 정도가 소요된 것 같다.


하지만 그동안 모은 몇 천만원의 돈을 몽땅 쏟아부은 캐나다 생활에서 남편은 얻지 못했지만,

친구라는 더 소중한 존재들을 얻게 되었다.

스위스와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살며 아직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말 소중한 인연들.

내가 회사를 퇴사하고 돈과 시간을 들여 캐나다에 오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얻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영어보다 이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

더 좋다.








<나의 20대 후반 그리고 30대의 시작>

9개월간의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다시 현실에 적응하는 데 걸린 시간은 딱 2달.

작은 회사에 재 취업에 성공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치 내가 언제 캐나다에서 유유자적 지냈냐는 것 처럼.


사무직도 싫고 현장직도 싫어.

반반인 곳이 나와 잘 맞겠다 싶었던 회사였는데

생각보다 몸을 많이 써서 힘들었고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있어서 꽤나 흥미?로운 곳이다.

같은 날에 입사했던 동생이 없었다면 감히 버티지도 못했을 회사에서

나는 6년을 버텼고 22년에 퇴사를 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며 코로나를 겪고 가장 친했던 동기는 코로나 시기에 퇴사를 하고

나는 그 시기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2020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과 동의하에 신혼 1년은 즐기고 이후에 2세 계획을 하자는 야물딱진 플랜을 짜게 된다.


신혼을 나름 1년간 잘 지내며 이제 2세를 만들어도 되겠다 싶어 계획에 돌입한다.

계획만 하면 바로 생길 줄 알았던 아기가 생각보다 쉽게 오지 않았고,

회사일이 힘들고 몸이 지쳐서 생기지 않는걸까 고민하며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두고 2세 계획에 전념했지만 아이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30대의 딱 중간 34.5>

그렇게 22년도에 내 인생에는 없을 것 같았던 난임시술을 시작하게 되었고,

24년 3월인 지금까지도 나는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계획하고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2세 만큼은 그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건강한 줄 알았던 내 몸은 생각보다 건강하지 않았고

순탄하게 흘러갈 것 같았던 시간들은 매일매일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 위해 이제는 노력하고 있다.


그동안의 시험관 과정과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나가보려고 한다.

그리고 머지 않은 미래에 예쁜 아기가 찾아오길 바라며

이 곳에 글을 쓰고 많은 감정을 공유하며 마음을 편히 가져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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