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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다 Sep 19. 2022

가을 안반데기 배추밭 사잇길 따라  

강릉살이2_배추밭은 왜 우리를 설레게 하는가

안반데기하면 별이지요. 별 보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을 안반데기 배추밭은 낮에 봐도 멋집니다. 드넓고 가파른 고원지대에 푸른 배추가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이 '멋지다'는 어디서 나오는 감정일까요? 평소에 못 보던 것을 봤을 때? 철학자 칸트는 숭고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판단력 비판에서 그런 얘기를 했지요. 우리가 어쩌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껴지는 장엄함에 대하여요.  



강릉의 바다만 봐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지요. 안반데기 배추밭에서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무수히 심어진 배추를 보고 있으면 신기해집니다. 인간의 노동이 이룩한 산물임에도요. 저 무수한 배추가 어디선가 김장김치로 둔갑하는 상상이나 그 배추 씨를 뿌리고 뽑는 인간의 노동이나 아주 일상적일지도 모를, 그러나 그동안은 지나쳐온 것들에도 생각이 미칩니다.  



강릉 바우길 중 안반데기를 한 바퀴 도는 길이 있습니다. 16구간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다른 바우길 코스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출발지인 안반데기에 가는 일 자체가 꼬불꼬불 경사로를 올라야 해 어렵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강릉에 살다 보면 동쪽은 맑고 서쪽은 흐린 날이 많습니다. 집이 바닷가 근처라 이 차이가 확연한 편입니다. 멀리 수평선 인근은 밝지만 대관령 위쪽으로는 구름이 껴 있는 것을 보며 지형과 기후의 상관관계 같은 것을 실감하곤 하지요.

  


그래서 맑은 날이 아니면 대관령으로 가는 길은 구름 낀 산으로 들어가는 오묘한 느낌입니다. 대관령을 넘지 못한 구름이 대관령 위에 가득 피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딘가에 살면서 어느 산을 넘지 못한 구름이 가득 걸려 있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강릉에서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자주 대관령을 보면 대관령에 산신이 있다는 생각은 아주 당연하게 들 수밖에 없겠구나 싶어집니다. 국사성황신을 모시는 국사성황당이 대관령에 있는 이유를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달까요.



안반데기로 가기 위해 닭목령을 넘다 보면 길의 각도에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구비구비 길을 만든 인간에게도 놀라게 되고 그 위에 움푹 파인 고지대를 일궈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도 놀라게 되지요. 우리가 갔던 시기는 배추를 수확해 출하하는 중이라 큰 트럭들이 배추를 실어나르고 있었습니다. 인간이란 정말 놀라운 지점 투성이구나, 이런 기술이 모두 인간으로부터 나와서 어느 식탁의 김장김치가 돼다니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엄청난 추위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라 더 그랬을 테지만, 해발고도 1100미터의 기온은 확실히 다릅니다. 추위 대비를 하고 가야 하는 곳이지요. 



강릉시청 정보를 보면 안반데기는 1965년 산을 깎아 개간하고 화전민들이 곡괭이와 삽으로 밭을 일구어 정착하며 형성된 곳으로 1995년에는 28가구 남짓 안반데기 주민들이 정식으로 매입했다고 합니다. 이름은 떡메로 떡을 치는 안반처럼 우묵하면서도 널찍한 지형이 있어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오목하고 넓은 통나무 받침판 '안반'에 평평한 땅인 '덕'의 사투리형인 '데기'를 붙여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안반데기에서 느끼는 이 감정의 이유가 궁금해 오랜만에 칸트를 다시 들여다보다 답을 찾았습니다. 안반데기에서 내가 느낀 이 감정은 무얼까 했는데, 나는 안반데기에서 그 거대한 자연과 인간의 노동에 대해 숭고라는 감정에 휩싸인 것이라는 사실을요.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존재로서 존재하며 생식하고 유전자를 전달하고 살아감을 살아갑니다. 생이라는 것이 내는 환희가 거기에 있으나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렇게 할 뿐이지요.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자연이라는 이 이름에 이미 이런 뜻이 다 들어있다 생각하면, 언어 속에 깃든 사람들의 생각에 놀라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자연 속에서 인간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이게 요새 궁금증이었습니다. 나는 왜 이 자연 속으로 오고 싶었던가 하고요. 그 답이 칸트에게 있었습니다. 안반데기에 다녀와 오랜만에 ‘숭고’라는 개념(오래 전 공부했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장엄함에 대해, 내 작음을 알게 해주는 것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떠올렸습니다. 거기서 ‘숭고해’한 것은 아닌데 뭔가 이 잘 모르겠는 감정의 답이 필요해서 숭고미를 이야기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보았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거대한 것을 보며 자신의 작음을 느끼고 자신이 그 작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쾌감, 고양되는 감정에 빠져든다고 합니다. 상상력과 이성의 유희라는 작용이 마음에서 일어나며 생동감을 느끼게 된다는 겁니다. 배추의 수를 세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세자고 하면 셀 수도 있겠지요. 무한한 수에 비해 이 배추의 수는 작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수란 늘 상대적이니까요. 그리고 이 무한을 떠올리는 '나 대단해' 한다는 건데요. 이런 식으로 순차적으로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고원지대에 이런 움푹한 땅이 있어 여기 기후에 적합한 배추를 심고 밭을 일구고 한 인간의 시간들과 더불어 자연이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너머의 거대함 앞에서 나의 작음을 받아들이지만 적어도 내가 이 자연의 시간을 다 그려볼 수 없으나 그럼에도 그것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빠져든다는 것이지요.  



안반데기에서 배추꽃은 못 보았지만 며느리밑씻개와 미꾸리낚시, 고마리의 비슷한 듯 보이는 꽃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잎 모양이 다 달라서 입니다. 며느리밑씻개의 잎은 세모지다면 미꾸리낚시는 잎이 둥글고 길쭉합니다. 고마리는 고마리 특유의 모양이라 구분이 좀 더 쉬운 편이지요. 실제로 며칠 전에 이 꽃은 누구냐 하다가 잎을 보고 구분하며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녕, 내 이름은 미꾸리낚시야.
내 이름은 며느리밑씻개. 놀라운 이름이지ㅠ. 심저 며느리배꼽도 있어. 정말 놀랍기 짝이 없지만, 그래.
내 이름은 고마리야. 꽃은 위에 애들이랑 비슷해 보이지만 잎 모양을 보면 다르다는 것을 알 거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리나 닭의 장풀 꽃도 유독 색이 예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주변에 시야를 흐트러뜨릴 만한 것들이 없어서지요. 미국가막사리도 여기저기 자주 보입니다. 하산하여 찾아보니 비슷하게 보이는 미국가막사리와 도깨비바늘은 혀꽃이 있나 없나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자주 보인다고 하는데 초록 꽃받침 조각을 꽃잎처럼 달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였지요. 


파란색 꽃이 예쁜 닭의장풀
참싸리 꽃
미국가막사리

이 자연은 저 스스로 그러하고 이름이나 특성을 인간은 분류합니다. 때로는 약초로 쓰기 위한 이로움을 위해서기도 하지만, 지금 이렇게 여기저기 자연 속을 돌아다니며 이름을 아는 것은 그래서는 아닙니다. 아마 그 이름을 아는 일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닐까, 다음 단계는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작은 꽃에 깃든 생명의 조화로움이 좋아서겠지요. 인간은 그 조화와 상상력의 유희를 즐기며 기쁨을 느끼는 동물이니까요. 무지막지하게 크고 무지막지하게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이것들이 이루고 있는 어떤 조화로움에 놀라며 살아있음에 감탄하는 것이지요.


굳이 데려와 보니 이리 예쁠 수가 싶던 도암댐 부근에 피어있던 각시취 꽃

한때는 책도 들여다보고 공부도 하였으나 직장을 다니다보면 칸트나 이런 이름들은 다 희미해지고 맙니다. 경제의 바퀴를 굴리는 일반 직장인 세계에 도움이 되기 힘들고 그 세계 속에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모하였기에 책을 읽고 생각할 에너지도 남지 않게 되니까요. 그래서 한때는 이 헛된 이름들을 왜 나는 좋아했지 싶기도 하였으나 결국 답이 필요할 때면 찾게 되고 답을 주기에 그는 철학자로 영영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구나 오랜만에 좋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도 모르던 것을 알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니요. 


하산하는 길에 도암댐을 지나 노추산 모정탑 부근을 들렀습니다. 기린초, 바위채송화, 좀바위솔이 있는 바위 부근에서 이들을 보고 있지나 지나던 사람들이 거기 뭐가 있어 그리 들여다 보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식물을 보고 있다고 하니 다들 지나쳐 갔습니다. 보지 못하면 그대로 지나가고 볼 수 있다면 보는 것이 식물인가 봅니다. 좀바위솔은 9-10월에 자홍색 꽃이 핀다고 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꽃 핀 좀바위솔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기린초, 바위채송화
좀바위솔, 곧 자홍색 꽃이 필 거야.


* 식생 관련한 부분은 서영석 숲해설사님과 숲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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