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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림 Jul 29. 2022

나쁜 남자를 사랑할 권리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0회

지적 장애인은 보호받아야할 존재인가? 아니면 존중받아야할 존재인가? 물론 지적 장애인은 보호도 받아야하고 존중도 받아야한다. 하지만 두가지가 출동하는 상황에서라면? 10회가 그러한 상황이었다.


피고인인 남자는 불순한 목적으로 지적 장애가 있는 여자에게 접근한게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걸 모르지 않음에도 피해자인 여자는 그가 처벌받지 않길 원했다는 것. 법이 피고인을 처벌한 건 고소하다. 그리고 법은 피해자를 보호하는 게 맞다. 


그런데 말이다. 내가 궁금한 건 일상생활에서다. 당신의 지인이 지적 장애인이고 저러한 상황에 처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이용당한다는 걸 알면서도 남자를 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런건 일반인의 연애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일이다. 문제는 증인으로 등장한 의사의 말처럼 지적 장애인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이 부분에서 우영우와 피해자의 엄마는 격렬하게 대립한다. 엄마에게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은 보호해야할 대상인 반면, 우영우에게 피해자는 하나의 인격체다. 설사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선택을 하더라도 ‘오롯하게’ 감당하는 인격체. 


그걸 우영우는 “나쁜 남자를 사랑할 권리는 장애인에게도 있다.”라고 표현했다. 필자도 처음에는 우영우처럼 피해자를 존중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바스라지더라도 스스로를 망칠 권한은 오직 스스로에게 있고 피해자가 그걸 선택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해자는 법정에서 증언을 하던 도중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엄마에게로 도망쳤다. 법적으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과중한 심리적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걸 보니 과연 피해자를 존중하는 것이 피해자를 위한 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넌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거니까 그냥 이렇게만 해.’ 이렇게 선택을 막아놓는 것이 과연 맞는 건가하는 의문이 생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정말 어렵다.


다만 피해자 엄마의 태도가 조금 많이 아쉬웠다. 피해자 엄마는 아이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 지적 장애인 딸, 그것도 돈이 많아서 표적이 되기 좋은 딸을 키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영우에게 화를 내는 것도 심정적으로는 이해는 간다. (그게 옳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 지금 피해자 엄마가 가장 목표로 하고 있는 피고인의 처벌은 보복에 기반한 것이지, 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진 못한다. 


하지만 피해자 엄마는 너무 화가 나 있고, 그런 나머지 딸의 마음을 치유하는 게 먼저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은 거 같았다.


재판을 방청하는 것보다 딸을 상담을 받게 해서 마음을 보듬게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피고인의 처벌에 있어 피해자의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다 한 상태이고 말이다.


재판을 보여주는 게 피해자에게 피고인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여주고, 더불어 자신의 화도 풀고 싶어서 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더 분노하게 되었고, 피해자는 피고인을 여전히 놓치 못했다. 결과적으로 어떤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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