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인물촬영, 창덕궁

by 김형범

어제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늘 오보투성이라 불리던 일기예보가 어제만큼은 기막히게 정확했다.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려 온 창덕궁 인물 사진 출사가 강한 빗줄기에 하루 연기되었다. 단지 하루, 24시간이 미뤄졌을 뿐인데도 커다란 아쉬움의 파도가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비 오는 야외에서 인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우천 시에도 강행합니다.’라는 문자를 기다렸었다.

“괜찮아, 내일이잖아. 지금까지 잘 기다려 왔는걸.”

스스로를 다독이며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이른 새벽,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창문 앞에 앉아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지만, 가슴속에 차오르는 기대와 긴장 때문에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아침 아홉 시, 창덕궁에서의 첫 인물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동안 가족이나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관광지를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찍던 것이 전부였던 내가 난생처음 전문 모델을 마주하게 되었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눈부신 전문 모델의 눈빛을 바라보며 초점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안국동은 너무나 차분했다. 일요일 이른 아침, 거리엔 출근길의 분주함과 관광객들의 시끌벅적한 소란함이 없었고, 산책 나온 주민들만이 그들의 반려견과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어쩌면, 그들 눈에 비친 나는 한국을 여행하는 어느 아시아의 관광객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경복궁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는데, 한 가족이 내게 다가와 영어로 물었다.

“Could you please take pictures of us?”

그들을 외국인이라 생각한 나는 영어로 답했다.

“Sure. I will.”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주고 카메라를 건네는 순간, 그 가족이 우리말로 말했다.

“저리 가보자.”

우리는 서로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돌아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엥. 내가 외국인처럼 보였다구? 어디를 봐서 내가... 기가 막히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은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시간도 많이 남았고, 햇볕이 따가워 매표소 옆 현대원서공원으로 올라갔다. 햇살을 피해 보려 했지만, 아침 햇살을 가려줄 마땅한 벤치가 없었다. 그나마 해가 덜 드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카메라를 꺼내 들고 화이트밸런스를 확인하고 조정했다. 셔터 속도를 1/125초로, 조리개는 f/8로 맞췄다. 나는 ‘픽처 스타일’을 거의 쓰지 않는다.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하더라도, 자연이 보여주는 색 그대로를 담고 싶었다.


약속 시간 20분 전, 매표소 앞에는 이미 긴 줄이 서 있었다. 잠시 뒤, 지도 작가님과 모델 두 분이 도착했다. 빛의 종류와 활용법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인정전에서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확산광을 이용하라는 설명을 들었기에, 햇빛이 강하면 잠시 촬영을 멈췄다가, 해가 구름 속으로 숨어 부드러운 빛이 비칠 때 다시 셔터를 눌렀다. 모델들은 수시로 자세를 바꾸었다. 순간순간 초점을 놓쳤다. 아주 여러 번 알맞은 구도를 잡지 못해 어색한 사진들이 찍혔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어떤 이는 연사 모드로 카메라를 설정하고 셔터를 눌러댔다. 나도 따라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한 장씩 신중히 찍기로 했다. 모든 포즈를 다 찍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남을 단 한 장이라도 찍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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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게 초점과 구도를 잡고 있는데, 갑자기 뷰파인더 속으로 커다란 머리통이 불쑥 들어왔다. 함께 출사 나온 미운 동반자였다.

“찍고 있는데 앞으로 지나가지 맙시다.”

처음에는 점잖은 말투로 조용히 말했지만, 그는 이후에도 몇 번이나 내 앞을 가로질렀다. 결국 나는 언성을 높였다. 또 다른 미운 동반자도 있었다. 그는 모델에게 바짝 다가서서 다른 사람들의 카메라 화각 속에 자신을 노출시켰다. 다가가서 등을 확 밀어 버리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만 악의에 찬 주문을 외웠다.

“저러다 자빠져라, 자빠져라. 제발 한 번만 자빠져라.”

하지만, 그는 끝내 넘어지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은 나는 마음이 조급해져 인물사진의 금기사항을 지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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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에서 구선원전, 대조전으로 이동하며 한복을 입은 여인을 사진에 담았다.

조지훈 시인의 ‘승무’가 떠올랐다.

「...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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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 낙선재로 자리를 옮겼다. 제법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아져 촬영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낙선재 툇마루에서 측면광을 받는 모델의 윤곽이 아름다웠다. 그때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모델의 자태에 매료되었는지 자리를 뜰 줄을 몰랐다. 그들의 시선 속 모델은 이미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모델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건물의 뒤편에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건물의 앞쪽에서 모델을 바라보고 있어서 관광객들이 사진의 배경이 되어버렸다. 낙선재에서의 촬영은 이렇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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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출사는 숙장문 옆 회랑에서 모델의 마지막 포즈로 끝났다. 비록 멋진 사진은 몇 장 없었지만 배운 것이 많았다. 빛이 있는 곳엔 늘 기다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내 사진을 조금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무겁고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창덕궁을 뒤로하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다음엔 더 멋진 사진을 찍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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