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소기간

by 흠흠

제1부 집행유예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다. 경숙은 밤 늦도록 집에 오지 않는 기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도 안 되고, 문자를 보내도 아무런 답이 없었다. 1시까지 초조히 기다리다 살포시 잠이 들었다.


경숙은 그러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시간은 새벽 4시 무렵이었다. 낯선 전화번호였다.

"여보세요"

"여기 경찰서인데요. 경숙씨 되십니까?"

경찰서라는 말에 경숙은 깜짝 놀랐다. 경숙이 그렇다고 하자 상대방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아, 기철씨 부인되시죠. 오늘 밤에 기철씨가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분을 성폭행하려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들에게 체포가 되셔서요. 지금 저희 경찰서에 있습니다."


뉴스 사회면에서나 접하던 단어들이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꽂혔다. '성폭행', '체포'. 경숙은 과호흡이 온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경숙은 일단 전화를 끊고,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고 택시를 불러 경찰서로 찾아갔다.

경찰서에서 기철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기철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다가 담배 피우러 나간 것뿐인데... 정신 차려보니까 경찰들이 나를 누르고 있었어.."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경숙은 기가 차서, "경찰서까지는 어떻게 왔어?"라면서 더 말을 해보라고 했다.

기철은, "경식이가 경찰차에 같이 타줬는데, 경식이 말로는 내가 다른 여자를 덮칠려고 했었다더라고.. 근데 나는 기억이 하나도 안나니까..."라고 하면서 정신이 반쯤은 나간 표정으로 경숙을 쳐다 보았다.


경숙은 경찰에게 가서 어떤 사건인지에 대해 물었다. 경찰은 이미 기철의 친구들과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고 했다.


경찰은 "피해자와 친구분의 진술을 종합하여 봤을 때, 남편분은 술을 마시다가 옆에 있는 여자가 나가자 따라 나갔습니다. 옆의 여자분과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여자분에게 다가가서는 담배를 뺏었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갑자기 여성분을 껴안고 가슴을 만진 다음 바지속으로 손을 넣으려고 했답니다. 그 여자분은 남편분을 밀어내고 술집으로 뛰어 들어가 112에 신고를 해달라고 했다네요."라면서 덤덤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면서 그 골목을 비추는 CCTV가 있는데, 날이 밝으면 그 영상을 확인해 볼 예정이고, 혐의가 인정되면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구속영장!' 정말 뉴스에서 듣던 말을 실제로 듣게 되자, 경숙은 그만 경찰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CCTV에 찍힌 영상에는 범행장면이 고스란히 촬영되어 있었다.


기철은 결국 구속이 되었다. 경숙은 재판 날 남편의 비굴한 모습을 대면할 때마다 자신의 삶도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경숙은 기철이 너무너무 미웠지만, 별다른 직업도 없었던 경숙으로서는 기철이 받아오는 월급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그 여성을 찾아가 빌고 또 빌었다. 피해를 입은 여성은 경숙을 만날 때마다, "아주머니 같으면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합의를 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라면서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경숙은 그 시선을 모두 견디며 겨우 합의를 받았다. 너무너무 참담했다. 경숙 덕에 기철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석방되던 날, 경숙은 교도소 앞으로 기철을 데리러 가지 않았다. 집에 온 기철은 경숙에게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제2부 기철의 실직


기철은 그 후로 술의 양을 좀 줄이긴 했지만, 회사일이 힘들다면서 술자리는 여전히 잦았다. 그리하여 집행유예 이후에도, 경숙의 삶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경숙은 그럴 때마다, 다른 여자를 강간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부정행위에 해당하고, 계속 그렇게 술을 마시면 진짜로 이혼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기철은 경숙이 이혼하자는 말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 사건으로 인하여 알아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오히려 기철은 경숙이 긁는 바가지 핑계를 대면서 술을 더 마시곤 했다.


기철의 음주는 기어이 사고로 이어졌다. 기철은 어느 날 또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경숙은 또 경찰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음주운전이었다. 술에 취한 채 운전해서 집에 오다가 음주단속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신원조회를 해보니 집행유예기간 중이어서 바로 체포가 되었다고 했다. 경숙은 이번에는 경찰서에도 가지 않았다. 기철은 결국 구속기소 되었다.


기철의 회사에서도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기철은 해고되었다.


재판결과 기철은 집행유예기간 중 자숙하지 아니한 채 음주운전을 한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나, 음주운전으로는 처벌받은 전력이 없고, 인적·물적 피해가 없는 점 등이 고려돼 벌금 천만 원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것은 다행이었으나, 당장 벌금을 내기에도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철은 석방 이후에도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경숙이 "막노동이라도 해라."라며 등을 떠밀었다. 기철은 처음 몇 번은 밖에 나가서 일자리를 알아보는 시늉이라도 하더니, 며칠 후에는 ‘허리가 아프다’,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집 밖에 조차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기철은 "다른 집 여자들은 남편이 직업이 없으면 나가서 돈도 벌어 오드만, 너는 왜 집에만 있냐?"라면서 오히려 화를 버럭 냈다.


경숙은 그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늦어버린 것 같았다. 조용히 짐을 싸서 어머니 혼자 계시는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제3부 법정


경숙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법원 청사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설 때, 경숙은 3년 전 경찰서 바닥에 주저앉았던 자신을 비로소 일으켜 세우는 기분이었다. 경숙은 그때 이혼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경숙의 발목을 잡았다.


기철은 법정에서, “제가 3년 전에 술에 취해 다른 여성에게 실수를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원고는 저를 용서하고, 저를 위해 피해자와 합의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때는 이혼소송을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한번 용서했던 사건을 가지고 이제 와서 그때의 일을 빌미로 이혼을 청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라면서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기철의 말을 들은 판사는 법정에서 경숙에게, "원고, 피고가 강간미수 범행을 범한 게 3년 전이네요. 민법 제841조에 따르면 '부정한 행위'를 원인으로 하는 이혼 청구는 사후에 이를 용서했거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안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나면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어서요. 이를 이유로 한 이혼 청구는 적법하지 않아 보이는데요." 라고 하면서 경숙을 쳐다보았다.


경숙은 아찔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너무 억울했다. 어쩔 수 없이 피해 여성과 합의도 해주고 참고 살았을 뿐인데, 그것 때문에 이혼을 못하리라고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판사는,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숙을 보며, “원고, 원고 혼자서 소송을 진행하는 게 힘드시지요? 오늘 재판은 일단 마치고, 4주 후에 재판을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구요. 돌아가시는 길에 종합민원실에 들러 소송구조신청서라는 걸 작성하고 가세요. 그럼 검토해서, 소송구조결정을 해드릴게요. 변호사비용은 추후에 법원에서 지급해주는 제도니까, 일단 소송구조결정문을 가지고 변호사의 도움을 좀 받아보도록 하세요.”라고 하면서 경숙과 기철 모두에게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고는 재판을 마쳤다.


경숙은 법원으로부터 받은 소송구조결정문을 가지고, 법원 앞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변호사도 법정에서 판사가 했던 말처럼 민법상 부정행위에 해당하는 제840조 제1호로는 이혼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변호사는 경숙으로부터 기철이 음주운전으로 또다시 구속된 이야기, 그로 인해 실직을 했는데도, 취업을 위해 별다른 노력도 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잘하면 제840조 제6호 사유로는 이혼을 청구하는 것으로 하면 이혼이 될 것 같다고 하였다.


경숙은 여전히 참고 살았다는 이유로 부정행위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이혼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한편으로 안심을 하면서 법원에 출석했다.


판사는 법정에서 경숙과 기철사이의 혼인관계가 파탄된 것이 맞는지, 회복 가능성은 없는지 등을 조사해보겠다면서, 가사조사관에게 조사를 맡기겠다고 했고, 그로부터 넉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 넉달 동안 경숙은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경찰서에서 주저 앉아 일어서지 못할 때부터 홀로 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하마터면 이혼도 못할 뻔 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경숙은 식당에 들어가 주방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가사조사관 보고서가 재판부에 제출되었다. 보고서에는 기철의 무책임함으로 인해 혼인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조사보고서가 제출된 후, 재판이 한번 더 열린 후 선고기일이 지정되었다. 선고결과 경숙과 기철의 혼인관계는 종료되었다.



제4부 에필로그


선고가 끝나고 법원을 빠져 나오던 경숙은, 조사 과정에서 가사조사관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법정에서는 끝내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친 일로는 왜 이혼할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가사조사관은 우리 민법은 재판상 이혼 사유를 최대한 엄격하게 해석해서, 이혼을 최대한 방지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와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고 했다. 부정행위를 알고도 6개월을 참고 살았다면, 이혼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라는 것이다. 경숙은 여전히 그 논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법의 논리이지, 자신의 삶이 아니었다. 법원 청사를 나서는 길,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가슴속은 오히려 시원했다. 판결문에 적힌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는 글자가 햇빛에 반짝였다. 그녀는 이제야 깨달았다. 법에는 제소기간이 있을지 몰라도, 한 인간이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권리에는 유효기간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자신만의 진짜 삶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