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은 윤지와 언제부터였는지 서로 기억이 나지 않을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유치원을 같이 다녔던 기억부터는 확실했다. 그 무렵쯤이었던 것 같다. 성준은 유치원 때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말을 타는 기사를 보면서, 윤지에게 “내가 크면 기사가 돼서 널 지켜줄게”라는 말을 했던 것 같았다.
둘은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러다 중학교 때부터 남중과 여중으로 나뉘어 학교를 따로 다녔는데, 학원도 같이 다녔고, 모의고사라도 보는 날이면, “야 너 수학 26번 뭐라고 적었냐?”라면서 한 시간씩 시험문제와 학교생활 등에 대해 수다를 떨곤 했다.
윤지는 수도권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했고, 성준은 거기에 남았다. 그리고 성준은 군대를 갔다. 그렇게 둘 사이의 인연은 끝난 것 같았다. 윤지는 수도권에서 대학을 마치고, 거기서 직장을 잡고, 직장동료이던 현호와 결혼도 했다. 성준도 청첩장을 받고, 오랜만에 어린 시절 친구였던 윤지의 결혼식에 가서 윤지와 친구의 악수를 나누면서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성준은 제대한 후 복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계속 부모님과 함께 그 동네에서 살면서, 그 지역에 있는 조그만 공장에 취업을 했지만, 시골에 있는 조그만 공장에 다니는 성준과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없어, 삼십대 중반까지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윤지는 아이를 낳기 위해 퇴직을 했는데, 현호가 그만 실직을 하고 말았다. 퇴직한 후 집에서 육아를 하던 윤지가 다시 직장에 들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윤지의 친정 부모가 고향에 있는 지인에게 부탁해, 지인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윤지는 아들을 친정 부모에게 맡기고, 출근을 하기 위해 친정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윤지는 오랜만에 성준과 다시 인사를 나눴다.
윤지의 남편인 현호는 실직스트레스 때문인지 술만 취하면 유흥업소에 가서 아가씨들과 놀다 들어오기 일쑤였고, 집에 들어와서는 사소한 트집을 잡으면서 시비를 걸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찌검을 하곤 했다. 윤지는 어렸을 때부터 살던 동네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현호가 창피해서 그럴 때마다 이혼을 생각했었다.
그래도 커나가는 아들 생각에, 처음으로 자신을 설레게 했던 현호의 예전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런대로 하루하루 버티며 힘든 날들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어릴 때부터 힘들 때마다 토닥토닥 위로해주던 남사친인 성준도 힘든 결혼생활을 버티게 해 준 힘이었다. 성준은 윤지가 힘들다고 전화하면 마치 학창시절 때처럼 한 시간씩 자기 고민도 들어주고, 더 힘든 일도 많다고 위로도 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뭐 그딴 일로 힘들어하냐며 윤지를 혼내기도 했다. 그렇게 성준은 윤지를 응원하면서 윤지 곁을 지켜줬다.
그 날은 1월 17일이었다. 그날도 현호는 술에 취해 어느 유흥업소라도 다녀온 듯 상의에 립스틱 자국을 묻히고 들어와서는 괜시리 윤지에게 집이 어지럽다면서 시비를 걸더니 급기야 윤지의 뺨까지 때렸다. 윤지가 참지 못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더니, 현호는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하면서, 부모님 집으로 올라가겠다면서 집을 나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월 20일, 친가에 있던 현호는 윤지에게 '손찌검을 해서 미안했다. 나도 이제 지친다. 우리 그만 이혼하자. 아들은 니가 키워주면 좋겠다. 양육비는 부족하지 않게 보내줄게'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윤지도 이제 너무 지쳤다고 하면서 그러자고 했다. 둘은 그렇게 그날 법원에 협의이혼의사 확인신청서를 제출했다. 둘 사이에는 아직 어린 아들이 있어 협의이혼의사 확인기일은 3개월이 더 지난 4월 23일로 정해졌다.
협의이혼의사 확인신청을 하고 돌아온 지 일주일가량이 지난 1월 말 어느 무렵이었다. 윤지는 현호와 이혼이 후련하면서도 앞으로 어떻게 아들을 키울지 걱정이 되었다. 한동안 고민을 이어가다가, 성준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성준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윤지는 어렸을 때 성준이 기사가 되어 자신을 지켜주었다고 했던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났다. 성준이라면 아이의 좋은 아빠가 돼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윤지는 성준에게 연락해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성준이 식당에 약속시간 보다 다소 늦게 도착했다.
"아이고 윤지야, 미안하다.. 그나저나 잘 지냈어? 갑자기 밥을 먹자고 하고,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무슨 일은.. 그냥 갑자기 친구하고 밥이 먹고 싶어졌네.."
말을 마친 윤지가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어... 뭔가 이상한데... 무슨 일이 있구만.. 야 오빠한테 다 말해 봐봐.. 무슨 일인데?"
"......."
"야.. 빨리 말해봐봐"
“성준아... 남편하고 이제 이혼을 하기로 했어”
그 말을 들은 성준이 놀래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에 거세게 내려 놓았다.
성준은 “야.. 너 미쳤냐, 혼자서 아들을 어떻게 키울려고 그러냐”고 하면서 말을 하면서 윤지를 질책했다.
그 말을 다 들은 윤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성준을 바라보았다.
"성준아...."
그리고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성준이, '대체 애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라는 표정으로 윤지를 쳐다보자, 윤지가 성준의 눈을 보면서 입을 뗐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성준아, 니가 우리 아들의 아빠가 되어주면 안 될까?"
성준은 가끔 남편한테 시달리면서 사는 윤지를 타박하면서도, 아들 생각하며 참고 살라고 질책하기도 했었지만, 한 번도 윤지와 같이 산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던 터였다. 너무나도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으니까...
성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윤지를 일으켜 세웠다.
"야, 너 미쳤냐? 야, 오늘은 너무 늦었다. 얼른 들어가서 자라. 방금 들은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할꺼다. 알았지?"
성준은 윤지의 등을 밀면서 집에 들어 가라고 하고, 집에 들어왔다. 성준도 2, 3일 동안 윤지 생각에 잠도 제대로 못 잘 만큼 뒤척였다. 윤지와 같이 산다는 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아니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윤지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윤지 아들에게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들이 현호이를 보러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와 윤지 아들의 성이 다른 데 누가 놀리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에 선뜻 윤지에게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성준은 오랜 친구였던 윤지와 함께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열심히 헤쳐 나가보기로 했다. 그날 저녁 윤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랜 세월 친구로 지냈지만, 차마 그 말만큼은 전화로 하기 어려웠다.
'야, 내가 니 아들의 아빠가 돼 줬으면 한다는 그 말, 아직도 진심이냐?'
윤지는 현호와의 지옥같은 결혼생활을 끝내기로 할 즈음 자기의 곁에서 항상 자기를 돌봐주던 남자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다. 윤지와 성준은 현호와의 이혼이 마무리된 5월초가 되면 혼인신고를 하고, 성준의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 정리된 2월 중순부터 윤지의 아들과 함께 동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윤지와 성준의 사랑의 결실이 윤지에게 선물처럼 찾아왔다.
윤지는 새 생명을 품은 채 4월 23일 법원에 나가 현호와의 협의이혼의사확인을 받고 신고까지 마쳤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윤지는 결혼식 없이 오랜 세월 그렇게 고대하던 성준과 혼인신고도 마쳤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윤지는 출산예정일보다 조금 이른 11월 말에 2.8kg의 이쁜 딸을 낳았다. 둘은 이제 모든 어려움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큰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의 고요에 불과했다.
출생신고 과정에서 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났다.
윤지와 성준은 출생신고를 하려고 행정복지센터를 찾았다. 출생신고서를 받은 직원의 미간이 찌뿌려지더니, 여기저기 물어보려 다녔다. 무슨 일이지 하던 차에, 경험이 많아 보이는 직원이 다가왔다.
"아이엄마시죠? 아이 엄마께서 4월말에 이혼을 하셨더라구요.. 민법에 이혼한 때로부터 300일이 경과하기 전에 출생한 아이는 전 남편의 자녀로 추정되거든요."
윤지와 성준은 기가 막혔다. 윤지는 현호와 1월에 이미 이혼하기로 했는데, 이혼숙려기간 때문에 4월에서야 이혼신고가 되었을 뿐이다. 현호와의 부부관계는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새로 태어난 아이가 현호의 아이로 추정된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어이가 없었는데, 직원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도 있는데요.. 혼인신고 후 200일 이후에 출생한 아이는 또 새로운 남편의 자녀로 추정이 되거든요... 윤지씨가 성준씨와 혼인신고를 한 후 200일이 지나 애가 태어나서..."
여기까지 듣자, 윤지와 성준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정리하면 새로 태어난 아이가 법적으로는 현호의 자녀로도, 그리고 성준의 자녀로도 추정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윤지와 성준은 출생증명서 등을 보여주며, 현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출생신고를 받아주라고 떼를 썼다. 그랬지만 직원들은 안 된다고 하면서 법원에 '아이의 아버지가 성준이인지 현호이인지 정하는 소를 제기해서 판결을 받아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래서 윤지는, 어쩔 수 없이, 새로 태어난 아이가 성준의 친자라는 유전자검사 증명서를 첨부하여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현호를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그 소송은 현호가 전혀 다투지 않아, 의외로 일찍 끝나버렸다. 윤지와 성준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를 성준이라고 확인한다는 판결문을 받자마자 아이에 대한 출생신고를 마쳤다.
그런데 여기도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다툼은 또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제1장 서막
현호는 윤지의 소장을 받아보고 나서, 윤지가 예전부터 눈엣가시 같았던 성준과 혼인신고를 하였다는 사실과 윤지가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호는 윤지의 딸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어차피 자기의 아이일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현호의 관심은 윤지와 성준이 과연 언제부터 관계를 가졌는지 여부였다.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자.. 11월 말에 아이가 태어났으니까 10달을 거슬러 올라가면 1월이네.. 그때는 내가 윤지에게 이혼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 때였을 수도 있는데.. 이것들이 그때부터 관계를 가졌다는 거구만..'라는 생각을 하고서는 현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현호는 방에 누워서 생각을 더 이어갔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윤지와 4월에서야 이혼신고를 마쳤으니 칠삭동이가 아닌 이상 나와 이혼이 안 된 상태에서 이놈들이 관계를 가진 것만큼은 틀림 없구만.. 옳지 이놈들 잘 걸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현호는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푸른 하늘이 마치 자기에게 큰 선물을 준 것 같았다. 현호는 다음 날 바로, 법원에 가서 윤지와 성준을 상대로 부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제2장 법정
첫기일이었다.
현호는 원고석에 서서 윤지가 법원에 제출했던 소장을 들어보이며 자신만만하게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판사님, 이 소장에도 잘 나와 있듯이 저는 피고 윤지와 4월 말이 돼서야 이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피고들은 2월부터 동거를 해서 임신까지 했습니다. 부정행위를 했다는 데 대하여 이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저는 너무나도 억울합니다. 전 남편이던 원고가 먼저 자발적으로 집을 나갔고, 그 이후에 원고가 먼저 이혼을 하자고 했습니다. 저희가 동거를 한 건 협의이혼의사 확인신청을 한 이후였습니다. 이 문자메시지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윤지는 법정에 있던 주무관에게, 2월 초에 성준이 윤지에게 보냈던 '야, 내가 니 아들의 아빠가 돼 줬으면 한다는 그 말, 아직도 진심이냐?'라는 문자메시지 캡처본을 증거로 제출했다.
현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성준이 윤지에게 저 메시지를 보냈을 때 저희는 이혼숙려기간이었습니다. 이혼숙려기간이란 이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이혼을 할지 말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는 시간일 뿐이라 원고와 윤지는 그때 아직 혼인기간 중이라고 봐야하지 않습니까? 이혼숙려기간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바람을 피워도 된다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판사님? 피고가 제출한 문자메시지는 혼인기간 중에 피고들이 부정행위를 했다는 더욱 명백한 증거일 뿐입니다"
현호가 거들먹거리며 자리에 앉자, 마침내 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사님, 저는 피고이기도 하지만, 원고와 피고 윤지 사이의 혼인 생활에 있어 그 증인이기도 합니다. 원고는 혼인 생활 중 자주 피고 윤지를 폭행했었습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집을 나갔습니다. 여기 원고가 피고 윤지에게 1월 20일에 보낸 메시지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성준이 문자메시지 캡처본을 주무관에게 건네자, 현호는 자기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증거로 제출되자 얼굴을 찌푸렸다. '아, 괜히 저런 건 보내가지고'라는 생각과 함께.
성준은 현호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 문자메시지는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잘해보자는 취지의 단순한 사과가 아닙니다. 원고가 피고에게 손찌검을 해서 미안하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는 며칠 전에 있었던 폭행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은 윤지가 경찰에 신고를 하려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원고는 이 문자메시지를 보냄으로써 혼인의 계속이 아닌 혼인 파탄의사를 표명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고와 윤지의 혼인은 이미 1월 20일, 아니 현호가 가출한 1월 17일에 이미 파탄되어 혼인으로서의 실체가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준이 윤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윤지는 성준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자기가 무섭다고 하면, 크면 기사가 되어 자기를 지켜주겠다고 하던 성준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세월이 지나 어렸을 때보다 더 멋지고 듬직해진 것 같았다. 윤지는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담아 자리에 앉은 성준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참 따뜻했다.
세 사람이 변론을 모두 마치자, 판사가 세 사람을 번갈아 가며 추가로 할 말이 있는지 물었다. 현호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 듯 손을 들려다, 엄숙한 분위기에 짓눌렸는지 들려던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모두들 더 주장하실 내용이 없으시면, 변론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판결은 2주 후에 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가 재판을 마쳤다.
제3장 판결
드디어 2주가 흘러,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린 선고기일이 다가왔다. 법정에는 고요만이 흐르고 있었다. 윤지는 잠이 든 둘째를 안고, 성준의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판사는 이유를 먼저 읽었다.
“비록 부부가 아직 이혼하지 아니하였지만 실질적으로 부부공동생활이 파탄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다면, 부부는 성적 성실의무를 부담한다고 할 수 없으므로, 부부 중 일방이 제3자와 성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부정행위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대법원 2014. 11. 20. 선고 2011므2997 전원합의체 판결 등 참조).
피고들이 윤지의 협의이혼 신고 전에 성관계를 했다고 하더라도, 원고는 혼인기간 중 윤지를 상습적으로 폭행함으로써 피고 윤지와 다툼이 격화되었고, 스스로 가출한 후 1. 20. 협의이혼 의사확인신청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원고와 피고 사이의 혼인관계는, 원고와 피고 윤지가 이혼하기로 합의하고, 협의이혼 의사확인을 신청한 1. 20.경에 이미 파탄되었다고 판단함이 타당하다. 따라서 피고들이 1. 20. 이후 성관계를 하였고(원고는 피고들이 그 이전부터 성관계를 하였다고 주장하나, 이를 인정할 증거는 없다), 그로 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를 일컬어 민법 제840조 제1호 소정의 배우자의 부정한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고 나서, 재판장은 힘주어 마지막 주문을 낭독했다.
“주문,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
윤지는 긴 호흡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짧지만 길었던 몇 달의 싸움이 한순간에 스쳐 갔다. 폭력이 일상이던 시간, 누군가의 일방적 소유물처럼 끌려가던 삶, 그리고 그 가장 어두운 틈 사이로 자신을 붙들어 주던 한 사람. 윤지는 조용히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현호는 패소사실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성준은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며 울먹이는 윤지를 끌어안았다. 잠에서 깬 둘째는 영문도 모른 채 윤지의 품에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소송이 끝난 지 1년 후, 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주말 오후였다.
성준과 윤지는 최근에 현호를 상대로 현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상우의 성을 현호의 성씨인 김씨에서 성준의 성씨인 이씨로 변경하여 달라는 취지의 재판을 신청하여 승소하였다. 이제 현호와는 완전한 남이 되었고 상우는 정말로 성준의 아들이 되었다.
윤지와 성준은 마당이 있는 작은 집에서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작은 마당에서 상우가 성준이 사 준 새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상우는 어느새 성준을 자연스럽게 '아빠'라고 불렀고, 성준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빠의 역할'을 묵묵히, 그리고 진심을 다해 수행하고 있었다.
"성준아, 거기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또 땀 흘리면 감기 걸려."
윤지는 이제 갓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둘째 딸을 조심스레 지켜보며 성준에게 잔소리를 했다. 성준은 상우에게 마지막 패스를 건네주고 윤지 곁으로 다가와 딸의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이젠 애가 둘이라 체력이 안 따라주네."
성준이 장난스럽게 윤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윤지는 웃으며 성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그 착한 친구의 미소가 있었지만,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깊고 듬직했다. 현호에게 시달리던 과거의 그림자는 더 이상 그녀의 삶에 남아있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네가 나를 지켜주는 기사가 되겠다고 했잖아. 진짜 기사가 되어 내 옆에 있어줘서 정말 다행이야."
"기사는 공주를 지키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이제 나한테는 지켜야 할 왕자님이랑 공주님이 둘이나 더 생겼는데, 앞으로 더 잘할게."
윤지와 성준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꼬옥 잡았다.
상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와 성준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빠, 같이 축구해요!“
성준은 상우를 번쩍 안아 올렸다. 윤지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지옥 같던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진짜 가족의 이야기가 지금, 이 평화로운 마당에서 비로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