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와 나

by 흠흠

제1부 그 남자아이 이야기



오전 11시쯤 아들 녀석이 전화로, 내일 치를 수능시험장이 조대부고로 정해졌다고 알려왔다.

나는 "응, 알았어"라는 짧은 대답을 남기고 아들을 예비소집 장소인 조대부고로 데려다 주기 위해 사무실에서 출발했다. 예비소집일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운전대를 잡은 손끝과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겨울 풍경 너머로 눈 내리던 어느 예비소집 날과 오래전의 한 아이가 떠올랐다. 이름도, 얼굴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이였다.

○○학원 문과반의 사회, 세계사, 생물반 교실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빈자리가 없을 만큼 재수생과 삼수생들로 늘 가득했었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남학생들은 창쪽, 여학생들은 복도쪽으로 나누어 따로 앉아서 수업을 들었었다. 그러다가, 모의고사를 치르는 날이면 번호 순으로 섞여 앉아 시험을 치렀다.

그 아이는 나의 바로 앞 번호였고, 그래서 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내 옆자리에서 나와 나란히 앉아 시험을 치렀다. 키도 작고 체구도 작아 무척 아담했던 그 아이는 참 성실히 문제를 풀었다. 또박또박 문제를 풀던 그 아이의 자그마한 손끝과 문제를 풀면서 손으로 빗어 넘기던 앞머리가 참 예뻤다. 잦은 모의고사로 인해 나란히 앉게 되는 날이 많아지자 나는 그 아이와 자연스레 가까워졌고, 독서실에서도 가까운 곳에 앉아 공부를 하고는 했다.

시험을 치르고 나서는 시험 후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던 고등학생 때의 기분을 내 보자며,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었다. 몇 편의 영화를 함께 보았는데, 전교조라는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이었는지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나서, 사람들로 그득했던 충장로 거리를 걸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기억이 난다.

나는 당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학력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재수학원엘 다니고 있어서 재수생들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런데도 나는 재수생들에게 꿇리기 싫어서 마치 재수생인 것처럼 하고 다녔었다. 그러다 언젠가 재수생이 아닌 게 들켰고, 그게 소문이 나 재수생들은 나와 어울리는 걸 피했더랬다. 그런데, 그 아이는 재수생이었음에도 나보다도 생일이 20여일 늦어서 그런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학력고사를 치를 때까지 나와 여전히 친구처럼 잘 지내주었다.

그 아이와 나는 나란히 전남대학교에 원서를 넣었었다. 그해의 예비소집날에는 눈이 많이 왔었다. 예비소집을 위해 나는 법과대학으로, 그 아이는 사회대학으로 갔다. 예비소집 날 처음 올라가 보았던 법대 앞 난파동산의 나무들이 눈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예비소집을 마치고 마지막 정리를 위해 그 아이와 함께 학원으로 갔다. 학원으로 가는 버스안.. 시험을 앞둔 긴장감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 아이도 말이 없었고, 나도 긴장감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 보면 꼭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뛰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오늘 같은 예비소집일이거나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그때 생각이 난다.


그해 수학시험이 많이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무난히 합격했는데, 그 아이는 그러지 못했다. 그 아이는 무척 힘들어 하다가, 후기로 목포대학교에 갔었다. 입학한 후에도 한 두 번 만났었는데 기숙사에서 남학생과 룸메이트가 됐다는 실없는 농담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목포에 놀러가겠다고도 했었는데, 지키지 못했다.

사는 곳이 멀어져 그 때 이후로는 그 아이를 보지 못하고 잊고 지냈다.

가끔 그 아이가 만약 전남대학교에 합격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문득 그 아이 생각이 날 때도 있다. 이제는 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아이의 행복을 빌어본다.

그 무렵 쯤 아들이 집 앞에서 내 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들의 모습 너머로 웃고 있는 나와 그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멀어진 시간 사이에서 나는 아들과 그 너머의 그 아이에게 알 듯 모를 듯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제2부 그 여자아이 이야기


평소에는 일찍 출근을 서두르는 남편이 수능시험일이어서 출근이 한 시간 늦춰졌다며 한껏 늑장을 부리다 출근을 했다. 나도 느지막이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초겨울의 맑은 햇살이 눈이 부셨다. 수능날이어선지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던 나의 학력고사 때의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첫 학력고사에서 불합격을 하고 재수를 위해 ○○학원 문과반의 사회, 세계사, 생물반에 등록을 했다. 재수생과 삼수생들로 가득했던 그 교실에서, 여학생들은 복도쪽, 남학생들은 창쪽으로 나누어 앉아 있다가, 모의고사를 치르는 날이면 번호 순으로 섞여 앉아 시험을 치렀다.

그 아이는 나의 바로 뒷 번호였다. 평소에는 멀찍이 앉아 있던 그아이는 시험을 치르는 날이면 내 옆자리로 와서 나와 나란히 앉아 시험을 치렀다. 재수생들은 대부분 저마다 불합격의 아픔을 안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 간절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에 아직 붉은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던 아담한 체구의 그 아이는 다른 재수생들과 달리 참 편안하게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 같은 모습이 참 부러웠다. 재수학원이어선지 모의고사는 자주 있었고, 그렇게 나란히 앉게 되는 날이 많아지자 나는 그 아이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독서실에서도 그 아이는 나와 가까운 곳에 앉아 공부를 하고는 했다. 독서실에서도 그 아이의 모습은 간절함 없이 참 편안했다. 그런데도 모의고사 성적이 나보다 좋아서, 내가 모르는 걸 물어보면 다정하게 설명을 해 줬었다.

고등학생 때는 시험 후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곤 했었다. 그 아이는 그 때의 기분을 내 보자며, 모의고사를 치르고 나서 영화를 보러가자고 했었다. 몇 편의 영화를 함께 보았는데, 전교조라는 당시의 시대상황 때문이었는지 선생님과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나서, 사람들로 그득했던 충장로 거리를 걸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기억이 난다. 사범대를 진학해 선생이 되고 싶었다는 그 아이는 스스로를 “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부르라던 로빈 윌리엄스와 같은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 그 아이가 자퇴생이어서 자기들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재수생이라고 속이고 다녔다는 소문이 돌았고 재수하던 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를 피했다. 그때서야 그 아이가 왜 지금까지 작년에 어디를 지원했다가 떨어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왜 재수생과 같은 간절함이 없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에게까지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소문이 날까 두려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 아이는 나보다 생일도 20여일 빨라 나에게 누나라고 부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여전히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다.

그 아이는 수도권에 있는 사범대학으로 가고 싶어했다. 그런데 부모님들과 이야기가 잘 안되었다고 하면서 전남대학교에 원서를 넣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아이와 나는 나란히 전남대학교에 원서를 넣게 되었다.

그해의 예비소집날에는 눈이 많이 왔었다. 예비소집을 위해 그 아이는 법과대학으로, 나는 사회대학으로 갔다. 작년에도 올라갔었지만 새로운 다짐을 하면서, 다시 올라가던 길이었다. 그날 보았던 사회대 앞동산의, 눈에 덮혀 반짝이던 나무들이 너무 예뻤다. 예비소집을 마치고 마지막 정리를 위해 그 아이와 함께 학원으로 갔다. 학원으로 가는 버스안.. 나는 또 실패를 하면 안된다는 긴장감에 짓눌려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모의고사를 보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너는 시험을 잘 볼 거야'라면서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오늘 같은 수능 날이면 그때 생각이 나기도 한다.

처음 봤던 학력고사 때와 달리 그해 수학시험은 많이 어려웠다. 그래도 그 아이는 무난히 전남대학교에 합격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삼수를 할 수가 없어 후기로 목포대학교에 갔었다.

입학한 후에도 광주에서 그 아이를 한 두 번 만났었다. 나는 그 아이의 질투를 기대하며 기숙사에서 남학생과 룸메이트가 됐다는 농담을 했었는데, 그 아이가 속도 없이 웃기만 했던 게 기억이 난다. 눈치 없는 놈. 그 아이는 목포로 놀러오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의 만남은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사는 곳이 멀어져 그 후로 보지도 못하고 한참을 잊고 지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아이의 소식조차 알 길이 없다.

가끔 나도 만약 그 아이와 함께 전남대학교에 합격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문득 그 아이 생각이 날 때도 있다. 이제는 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아이도 나처럼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래본다.

그 무렵 쯤 남편이 퇴근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편의 모습 너머로 웃고 있는 그 시절의 나와 그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멀어진 시간 사이에서 나는 남편과 그 너머의 그 아이에게 알 듯 모를 듯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제3부 에필로그 - 먼 훗날 우리


최근에 지나간 인연을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나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고난 후, 마치 영화에서처럼 먼 훗날, 이제는 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사람과 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타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치 영화에서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만약에 그때 우리가 같은 대학에 입학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물어보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 후,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그때 나의 집이 되어줘서 고마웠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때 미처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작별의 인사를 하고 싶다.

"잘가, 안녕"



[글쓴이의 노트]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스쳐 지나간 한 사람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분명하지 않았고, 한 때의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던 기억이었다.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보냈지만, 서로는 끝내 같은 방향으로 가지 못했던 순간들이 있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렸고, 각자의 사정은 우리를 다른 길로 데려갔다.

이 이야기는 그 시절의 ‘그 아이’와 ‘나’를 한 사람의 기억이 아닌, 두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불러내고자 한 시도이다.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전혀 다르게 남아 있는 감정, 말하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은 마음들을 조심스럽게 마주해 보고 싶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나 뒤늦은 후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절, 누군가가 잠시나마 나의 ‘집’이 되어주었던 시간에 대한 감사에 가깝다.

이야기의 끝에서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현실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아도, 기억 속에서만큼은 서로에게 따뜻한 안부를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한 번쯤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그 아이’를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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