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혜는 인구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영혜와 인구는 난임치료를 시작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영혜는 배란유도제를 맞을 때마다 힘들어 했고, 영혜의 몸은 그때마다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무겁고 낯설어졌다. 반면 영혜의 마음은 텅 비어 갔고, 그때마다 영혜는 술로 그 힘든 과정을 벗어나려 애썼다. 한두 잔으로 시작했던 술이 난임치료를 끝날 때쯤에는 한 병 넘게 마시고 있었다. 영혜의 부모와 친언니는 더 이상 영혜를 방치할 수 없어 영혜를 병원까지 데려갔는데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기로 했다.
인구도 영혜를 닮은 이쁜 딸을 갖고 싶었다. 햇빛이 잘 드는 방에, 작은 신발과 자그마한 옷, 아담한 장난감들로 방하나를 채워 놓으며 영혜와 햇빛보다 밝은 미소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래서 영혜의 힘든 난임치료과정을 함께 했었다. 그들은 자주 함께 울었다.
그러다 영혜의 음주가 잦아지고, 아이옷이 있던 방의 커튼이 걷히지 않아 어두울 때가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영혜의 우울증도 점점 심해져 인구가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인구는 회사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늘려갔고, 귀가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그렇게 인구는 점점 영혜를 외면하게 되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같이 지내던 찬미와 가까워졌다. 인구는 찬미를 바라볼 때마다 잿빛 속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불꽃을 느꼈다. 오래전 잊었던 설렘이, 식어버린 장작 속에서 기어코 살아남은 불씨처럼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찬미와 밤을 함께 보내고, 새벽에 집으로 귀가하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인구는 찬미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밥을 다 먹어갈 때쯤 찬미가 뭔가를 갈구하듯 인구의 눈을 바라 보았다.
“오빠, 오빠가 집에 가버리면 새벽에 나 혼자 많이 외롭잖아.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내가 가지고 있다가, 오빠가 집에 간 다음에 나 혼자 그거라도 보면서 외로움을 달래면 안 될까?”
인구도 그때는 그게 무슨 일을 초래할지 모른 채 그러자고 했다.
찬미는 인구를 집으로 보내고 나면 너무 허전했다. 외롭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찬미는 새벽녘에 인구를 집으로 보내고, 너무 외로워 그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인구 생각이 나 인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로 보냈다.
“까톡”
새벽에 잠을 자고 있던 영혜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인구의 핸드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 소리는 영혜의 심장에 날 선 조각처럼 박혔다.
‘이 새벽에 무슨 메시지지’라면서 영혜는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인구의 핸드폰을 열고, 알고 있던 패턴을 입력해 핸드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찬미라는 처음 보는 이름의 여자가 보낸 그 메시지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장면이야’라는 말과 함께 동영상 파일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영혜는 인구가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그 장면들을 차마 끝까지 다 볼 수가 없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그 파일을 자신에게 전달해 두고, 인구의 핸드폰을 방에 둔 채 밖으로 나왔다.
거실의 시계는 새벽 3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영혜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마시기 시작했다. 눈물이 흐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현실인지 믿기지도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왔고, 어느덧 시간은 6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안방에서는 인구의 뒤척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인구가 곧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인구를 어떻게 봐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모든 게 막막했다. 영혜는 마치 이제 곧 떠오를 태양 앞에 벌거벗은 채 서있는 기분도 들었다. 너무 부끄러워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는 기분이 들었다.
영혜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열고 언니에게 유서 같은 문자를 보냈다.
‘언니 나 너무 힘들어’
그리고 자신의 핸드폰에 있는 그 동영상을 언니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녀는, 베란다 난간에 섰다. 떨리던 손이 오히려 안정되었다. 하늘은 아직 차가웠고, 바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새벽 5시 55분, 영혜는 잠시, 아주 잠시 창밖을 향해 발뒤꿈치를 들었다.
장례식이 끝났지만 영혜의 부모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딸의 빈자리는 집 안의 모든 사물을 낯설게 만들었다. 식탁 위의 컵, 방문 앞 슬리퍼, TV에서 흐르는 웃음소리마저도 날카롭게 영혜 부모의 가슴을 비집고 들어왔다.
얼마 후 영혜의 부모는 인구와 찬미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피고석에 앉은 두 사람은 사과인지 변명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영혜 부모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영혜 부모의 옆에 선 변호사가 먼저 변론을 시작했다.
“판사님, 피고들은 부정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동영상 파일을 전송하면, 영혜가 이를 볼 수 있고, 그럴 경우 그 충격으로 인하여 영혜가 자살할 수 있으리라는 사정을 잘 알면서도 둘이 공모하여 동영상파일을 촬영하고 전송하였습니다. 따라서 저 두 사람은 영혜가 자살하리라는 사정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피고들은 부정행위에 따른 위자료로 1억 원, 영혜의 자살에 대한 위자료로 2억 원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혜 부모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법정의 공기는 마치 오래된 흙처럼 건조하게 영혜의 이름을 되씹을 뿐이었다.
인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찬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판사님, 동영상 파일은 찬미가 저에게만 보낸 것입니다. 이를 영혜가 보리라는 사정은 애초에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영혜가 저의 허락도 없이 핸드폰을 본 것일 뿐입니다. 게다가 부검결과 영혜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2%를 넘는 만취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영혜는 우울증도 앓고 있었습니다. 평소 앓고 있던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자살에 이른 것이지 동영상 파일이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구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후, 잠시 숨을 고르고는 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 변론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는 영혜의 상속인이기도 합니다. 영혜가 피고들에 대해 가지는 손해배상청구권도 상속의 대상이 되므로, 그 부분도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영혜의 부모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영혜가 자기 언니에게 차마 눈을 뜨고 볼 수도 없는 동영상 파일을 전송하고, 갑자기 자살한 것만으로 충격이었는데, 영혜의 예금과 보험금 등을 자기 딸을 죽게 만든 사위라는 자가 상속인이 된다고 하면서 가져가 버렸다.
인구가 영혜를 직접 살해한 것이 아니어서 상속결격 사유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영혜가 자살한 것이 인구의 책임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인구가 가져간 예금과 보험금도 돌려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지는데 영혜가 인구, 그리고 찬미에 대하여 갖는 손해배상청구권도 인구에게 상속이 된다니, 세상에 어찌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상속'이라는 말이 끝나자 마자 영혜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직접 반론을 했다.
“판사님, 어떻게 잘못을 한 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다시 잘못을 한 자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상속이라니요. 저승에 간 딸이 저 세상에서도 통곡을 할 일입니다.”
영혜 엄마는 자리에 앉아 눈물을 훔쳤고, 영혜 아빠는 분을 삭히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방청석의 딸이 아빠에게 뭔가 귓속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커서 법정에 울려 퍼졌다. “아빠, 재산분할” 그 말을 들은 영혜의 아빠가 추가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변호사는 필요없다고 하면서 제지를 했지만, 영혜 아빠를 막지는 못했다.
“판사님, 딸이 갑자기 저 세상으로 가는 바람에, 저희는 피고의 재산에 재산분할도 청구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딸도 자기가 퇴직하기 전까지 고생해서 함게 마련한 아파트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피고 명의로 등기가 되어 있다는 이유로 고스란히 전부 피고의 재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집에서 저것들이 편하게 살 생각만 해도 억울해 죽겠는데, 손해배상청구권까지 아무리 일부라고 하더라도 저 자에게 돌아간다니 미칠 노릇입니다.”
판사도 안타까운 마음에 인구에게 1억 원 가량이나마 지급하고 화해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인구는 판사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답변을 했다.
“바람을 피운 것과 영혜의 죽음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없고, 장인장모님께 정말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영혜가 자살한 이후에 원고들이 저희 회사와 저희 부모님댁까지 찾아가서 난리를 피우시는 통에 저는 회사도 그만 둬야 했고, 저희 부모님도 이사를 하셔야 했습니다. 저도 모든 걸 잃었습니다. 판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액은 도저히 지급할 수 없습니다.”
인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영혜의 부모도, 마지막으로 꼭 한마디만 하겠다고 하면서 손을 든다.
“판사님, 저희도 1억 원만 받고 소송을 끝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희 딸이 그렇게 애통하게 갔는데, 10억 원인들 충분하겠습니까. 법적으로 많은 돈을 받기 힘들다고 해서 3억 원만 청구한 것이지 1억 원으로는 택도 없습니다.”
판사도 한숨을 쉬면서, 재판을 마무리했다.
“네 모두 잘 알겠습니다. 사실관계는 서로간에 아무런 다툼이 없으므로, 변론절차는 이만 마무리 하겠습니다. 2주후에 판결을 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조심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재판내내 찬미는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 말도 없었다. 인구는 재판을 마친다는 판사의 말이 끝나자 비로소 찬미를 일으켜 세워 함께 법정을 빠져나갔다. 영혜의 부모는 법정을 빠져나가는 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판사는 당사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텅빈 법정에서 메모지를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사무실로 돌아가며 나지막하게 속으로 되되어 보았다.
“부모의 눈물이 이미 말라버린 정의를 다시 적실 수 있을까.”
제3부 에필로그: 남겨진 자들의 몫
판결문이 든 서류봉투는 거실 탁자 위에서 사흘째 뜯기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결과는 변호사가 미리 말해줬던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인구와 찬미의 부정행위에 대한 책임은 인정했으나, 영혜의 극단적 선택에 대한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다. 영혜의 우울증 진료 기록과 사고 당시의 혈중알코올농도가 인구 측의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인구는 자신에 대한 부정행위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 조차 일부 상속을 받았다. 결국 위자료는 청구 금액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 작은 수준으로 결정되었다.
영혜의 아버지는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영혜가 떠나던 날처럼 차가운 바람이 거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여보, 우리 항소는 하지 맙시다."
영혜의 아버지는 곁에서 마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던 영혜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영혜의 죽음은 법정 안에서 '알코올 농도'와 '우울증'으로만 환산될 것 같았다. 딸의 삶이 서류 뭉치 속에서 또한번 매장당하는 것을 더는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법은 정의로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법은 눈물보다는 증거를, 슬픔보다는 선례를 믿는 냉정한 계산기였다. 아버지는 탁자 위의 판결문을 집어 들어 깊숙한 서랍 안에 밀어 넣었다. 딸을 잃은 슬픔을 돈으로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나쁜 사람들로부터 '미안하다'는 진심 어린 참회를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 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제 우리 영혜... 그만 보내줍시다. 바람 부는 데 말고, 따뜻한 데로."
두 노인은 맞잡은 손의 온기에 의지해, 비로소 길고 길었던 법정 밖의 겨울을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는 영혜의 어렸을 때의 예쁜 기억들과 영혜가 좋아했던 꽃 같은 향기로운 기억들만 골라 담기로 했다.
정의는 마를 수 있어도, 부모의 기억은 마르지 않기에.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판결을 내리고 무거운 법정 문을 마음속에서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