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환은 요즘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환은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은정 대신 미현이와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나, 은정이 이혼을 해주지도 않고 유책배우자라 이혼소송도 할 수 없어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었는데, 갑자기 은정이 법원에 이혼소송을 제기해 준 것이었다. 영환은 드디어 은정과 이혼하고 미현이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미칠 듯 기뻤고, 너무나도 미웠던 은정이가 이쁘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소장을 받자마자, ‘은정과의 이혼에 동의하고, 은정이가 요구하는 위자료도 다 지급하겠습니다.’는 취지의 답변서까지 제출하고, 다가올 변론기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정은 아주 당당하게 바람을 피우는 영환이 너무너무 미웠다. 그러면서도 영환에 대한 감정으로 하루하루 무너져 가는 자신에게도 지쳐가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도 이제는 영환을 놓아주라고 했다. 친정엄마도, 사랑하는 딸도 이제는 그만 위자료 두둑이 받아서 독립하라고, 독립하면 엄마가, 그리고 딸이 도와 주마고도 했다. 너무너무 눈물나게 고마워서 이제는 나의 삶을 찾기로 다짐하고, 법원에 이혼을 해달라는 소장을 냈던 참이었다.
드디어 변론기일이 다가왔고, 영환은 미현과 함께 법원에 도착했다. 미현은 주차장에서 영환의 넥타이를 고쳐 매어주며, 애교까지 한껏 섞어 “자기야, 오늘 꼭 그 여자와 이혼하고 와야 해~, 그리고 나랑 꼭 결혼하는 거야, 알았지?”라면서 활짝 웃어 주었다. 영환은 이런 미현의 응원을 받고서는 기분이 좋아 휘파람까지 불며 당당히 법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주차장 한쪽 먼발치에서, 은정은 이런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았다. 어쩔 수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으면서,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법정으로 향했다.
제2부 법정
판사는 은정에게, “원고, 피고의 부정행위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하셨네요, 맞나요?” 물었다.
은정은 조용히 고개를 들면서 “그런데요, 판사님, 저는 소를 취하하고 싶습니다.”라고 짧게 말한 후 고개를 숙이면서, 이를 꽉 깨물었다.
판사가 다소 의외라는 듯, 은정에게, “지금 이 사건 소를 취하하시겠다고 하셨나요?”라고 다시한번 확인하듯 물었고, 은정은 조용히 “네 그렇습니다.”라면서 말을 마쳤다. 법정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영환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신이 멍했다. 그러다가 ‘아니 이 여자가 미쳤나, 이혼하겠다면서, 소를 제기했다가, 법정에서, 왜 갑자기 소를 취하하겠다고 난리야’라는 생각에 정신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판사가 넋이 나간 표정의 영환에게, “피고, 원고가 소를 취하하겠다는데, 동의하시나요?”라고 물었다.
영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판사님, 저는 원고와 꼭 이혼해야 합니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혼하겠다고 했다가,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원고의 소취하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고, 저 여자와 꼭 이혼을 해야 합니다. 이혼판결을 해 주십시오”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판사는 ‘그건 안된다’는 표정으로 영환을 보면서, “원고가 소를 취하했으니, 더 이상 재판을 할 수가 없네요. 재판을 모두 마치고, 2주 후에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모두 돌아가십시오.”고 하면서, 은정을 향해 마지막으로 다시 물었다. “원고, 이 사건 소를 취하하겠다는 마음은 그대로이신가요?”
은정은, 조용히 “네”라고 짧게 대답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환은 ‘아니 이런 낭패가 있나. 미현이가 오늘 꼭 은정이와 이혼하고 오라고 했는데, 큰일났네. 이제 어떡하나’라는 혼잣말을 하면서, 법정경위가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제3부 판결
영환은 2주후 법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판결문을 받았다.
주문은 “이 사건 소를 각하한다.”라고 짧게 기재되어 있었고,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재판상 이혼은 변론종결시를 기준으로 하여 민법 제840조 각 호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는 경우에 이를 이유로 혼인관계를 해소하겠다는 일방 배우자의 의사표시에 기하여 그 혼인관계를 강제적으로 해소시키는 것이므로, 소를 제기한 일방 배우자의 이혼의사는 소제기 이후 소송 종료시까지 존재하여야 하고, 만약 소송 계속 중 소를 제기한 일방 배우자에게 그와 같은 이혼의사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경우에는 판결을 통하여 혼인관계를 해소하거나 이혼청구권의 존부를 확정할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고는 이 법정에 출석하여 피고에 대한 소를 취하한 이상 원고의 피고에 대한 이혼 청구는 피고의 부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부적법하다.”
영환은 판결문을 읽고, 이혼에 실패하였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4부 에필로그
은정은 모처럼 집에 놀러 온 딸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 소는 왜 취하한거야?"
"응, 아침에 니 아빠하고 그 여자를 주차장에서 봤는데, 너무 다정하게 서있더라. 그 모습을 보니까 '내가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이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취하한다고 했어."
"후회는 안 해?"
"응. 그냥 이렇게 서로 남남인 듯 살려고. 이렇게 딸이 찾아오면 친구처럼 내 속 이야기하면서.."
은정은 딸을 보면서 웃었고, 딸도 엄마 손을 잡고서 엄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미소 뒤로 햇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