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 : 어디서든 행복하기
필자는 알제리에서 총 4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길다고 하면 길고 짧다고 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고, 또 그 시간들이 모이고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어 주어 지금은 참 고마운 추억과 경험으로 남았다.
돼지고기도 없고, 한국과자도 없고, 피시방, 노래방, 놀이공원 뭐 하나 ‘즐거움‘ 따위를 느끼게 해 줄 만한 무엇도 없는 곳이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곳에서의 삶도 나름 적응하게 되었다.
학교에 있는 알제리 사람들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래도 그들과 부대껴 살다 보니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과 어울려 노는 방법을 터득했다. 짓궂은 아이들이지만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그들 가운데 상냥하고 편견 없는 친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과 친해지지는 않았으나, 원래도 나의 성격상 넓고 얕은 관계보다 깊고 좁은 관계를 지향하는 성격 탓인지, 당시에도 친한 친구 2-3명 정도와 늘 어울려 지냈다. 무엇보다 나와 결이 맞아 매일 쉬는 시간마다 같이 구석에서 무언가를 하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모님도 그곳에서의 삶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어려움 속에서 행복을 찾고 그 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점점 터득했다. 배추가 없어 김치를 만들기 어려워 양상추로 김치를 담가서 먹었고, 콩나물 혹은 깻잎 같은 채소들을 구할 수 없으니 한국에서 씨앗을 구해와 정원에 심고 길렀다. 돼지고기는 1년에 한 번 아버지가 한국에 출장을 가실 때마다 사 오신 것을 소등분 하여 아껴 먹었다. 그렇지만 소고기는 풍부한 나라라 소고기를 활용한 요리를 자주 먹었다. 엄마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베이킹 책을 한국에서 사 오셔서 호두파이 심지어 피자까지 늘 손수 만들어주셨다. 덕분에 어릴 적 피부 아토피는 알제리에 와서 사는 기간 동안 전부 깨끗해졌다. 그렇다, 어디에 있든 행복은 있으며 그 안에서 즐거움과 긍정을 찾을 수 있다. 이 어려운 점을, 나는 어려서 깨달을 수 있었기에 감사한 마음이 크다.
집밥이 질릴 때면 시행착오를 통해 찾아낸 식당들을 가서 외식을 했다. 2007년에 막 알제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알제리 전체 한인의 수는 100명 미만이었다. 그렇지만 같은 해, 노무현 대통령의 알제리 방문으로 한국 기업들의 대거 수주와 유입이 발생, 한인들의 수가 이 전에 비해 상당히 늘어났다. 그렇게 같은 교회에 한인 교민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작은 커뮤니티가 생겼다. 이를 통해 서로 식당 혹은 카페 꿀(?) 팁들을 서로 공유하였고 그렇게 알제리에서 각자 서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종종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식당을 가거나 서로의 집에 초대해 저녁을 같이 먹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 모여 있기 때문인지 서로의 애환을 나누고 또 서로 위로도 해주며 알제리에서의 삶에 모두 적응하려 애썼다. 지금은 모두들 각자 흩어지게 되었지만, 부모님은 종종 알제리에서 만났던 인연들과 연락을 하신다. 이따금 만날 일이 있을 때면 당시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이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들로 변모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당시 정말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한국인이라 그런지 역시나 모두들 “돼지고기”에 미쳐(?)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알제리에서 돼지고기를 구하지? 가 늘 핫토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저씨께서 “빅뉴스!” 라며 오셨는데 그건 바로 돼지고기를 구하는 경로를 찾으셨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는 돼지고기 4글자에 눈이 휘둥그레졌고 그 출처를 빨리 알려달라고 보챘다. 다 큰 어른들 그리고 사회에서 한 자리한다는 어른들이 돼지고기에 집착하는 그 모습은 지금 봐도 진풍경이다. 역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그분은 대기업 지사로 오신 분이었는데, 자기가 친한 알제리 현지인이 멧돼지 사냥꾼이라는 말을 했고 그 사람을 통해서 고기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정보였다. ”멧돼지“라는 말을 듣고 모두들 잠시 흠칫하지만, 그들의 돼지고기를 향한 열망과 멧돼지에서 ’멧‘만 빼면 돼지는 돼지다! 라며 우리 모두 주문해 보자 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고 우리 집에도 (멧) 돼지고기가 도착했다.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비주얼은 내가 한국에서 늘 보던 삼겹살과 똑같았다. 불판이 적당히 달아오르자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고기를 올려 구웠다. 향긋한 돼지고기의 냄새가 거실을 채웠다. 우리 4인 가족은 각자 한 점씩 사이좋게 앞접시에 덜어 올렸다. 뜨거운 고기 한 점을 호호 불어 입 속으로 가져가 씹었다. 그리고 한입 씹는 순간.
다 버렸다.
정말 다 버렸다. 세상에 멧돼지도 돼지 아니냐고? 절대 아니다. 그건 돼지고기가 아니었다. 정말 질기고 씹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전부 다 갖다 버렸다. 그렇게 ’멧돼지 대첩’은 해프닝으로 끝났고 그날 이후 그 누구도 그 멧돼지고기를 언급하는 일은 사라졌다.
정말 웃지 못할 일도 많고 다사다난한 알제리에서의 삶. 이제는 여기서 평생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알제리를 떠나야 했다.
멀리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옆 나라 모로코에서 아버지께서 오시기를 원했고, 아버지는 고심 끝에 수락하셨다. 뜻밖에 일이었다. 모로코의 사정은 알제리에 비하면 훨씬 좋았다. 맥도널드, 스타벅스와 같은 체인점이 있었으며, 까르푸와 같은 대형 마트도 있었다. 산유국이 아니라는 특성 때문에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는 기조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생활환경 자체를 두고 보았을 때 알제리보다 더욱 좋은 환경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머뭇거렸다. 이 나라에 너무 많은 정을 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한인들은 모두 아쉬움을 내비쳤다.
우리의 떠남이 결정되자, 우리와 친하게 지내던 모 회사 지사장님은 송별회를 해 준다며, 요트를 대여하셨다. 친밀하게 지내던 한인 모두를 초대하셨고, 그렇게 지중해 바다로 배를 끌고 나가 갓 잡은 해산물을 숯불에 구워 먹으며 바다에서 수영을 했다. 그날 물놀이에 푹 빠져 있던 나였지만, 어른들은 들뜬 얼굴 이면에 서운함을 갖고 서로 진한 대화를 나누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지중해 바다 위를 가로지르던 요트 위,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던 그 기억이 선명하다, 아직까지.
우리가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커다란 짐 가방들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정이 많이 든 집을 떠나며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마음이 시렸나 보다. 훗날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수 없이 열고 닫았던 그 철문, 그 철문을 딱 닫을 때 철컹하는데. 꼭 이제 안녕이야 라는 소리로 들리더라. 이제는 작별이구나 라는”.
어머니는 울면서 알제리에 오셨지만, 떠날 때도 울음 속에 떠나셨다.
오래 걷기 위해서는 채우기보다는 버리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평생 살 것이라 생각해서 온갖 짐을 들고 온 알제리였다. 올 때 컨테이너를 띄웠는데, 떠나는 날 우리의 손에는 1인 2 캐리어뿐이었다. 필요한 거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두고 와야만 했다. 침대, 책상, 가구, 화장대… 나는 내가 아끼던 장난감들을 정말 모두 그곳에 두고 떠났다. 다 가질 수 없는데 우리는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손에 쥐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8살 어린 나이에, 나의 유년기의 대다수를 보낸 알제리를 떠났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자, 처음 여기에 도착한 그날 바깥 풍경이 떠올랐다. 여전히 모레 바람이 날렸고, 여전히 건물들은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무언가 집 같은 곳으로 변모했다는 점이었다.
2011년 7월, 정확히 4년이라는 시간을 채우고 나는 알제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