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정을 나누어 준 이방인
외국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알제리에서 산 다는 것은 위험함과 동시에 언어의 장벽 그리고 문화 정서적 장벽에 마주하게 된다.
이 전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알제리는 당시 테러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였다. 도로 위 검문소는 즐비했으며, 외국인들이 애용하는 식당과 호텔 앞에는 총기를 휴대한 경비원들이 늘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여담으로, 우리와 가까이 지내던 한인 아저씨가 하루는 호기심에 식당 앞 권총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경비원에게 “그 총 실탄 들어가 있어?”라고 너스레 물으셨는데, 그 경비원은 미소를 지으며 권총집에서 권총을 하늘로 한 발 쏘아 올리더니 “쏴볼래?ㅎㅎ”라는 일화를 말씀해 주셨다. 카더라인지 MSG가 가득 담긴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이후로 경비원들이 실탄을 소지하고 있는 건 맞다는 사실을 의심치는 않았다.
당시 알제리에서는 오토바이가 법적으로 금지였는데, 이유는 오토바이에 2명이 탑승한 채, 한 명은 운전, 뒤에 앉은 한 명은 폭탄 조끼를 둘러메고 표적 건물로 돌진하여 피해를 입히는 일이 너무나 흔했기 때문이다. 도로에 종종 오토바이가 난폭하게 운전을 할 때면 운전자들은 자연스레 긴장을 했다. 대다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비행청소년들이었다. 그렇지만 그중 어쩌면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알 카에다 조직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늘 위협이었다.
또한, 검문소가 단순히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외국인의 비율이 낮은 나라였고 당시 알제리의 최저임금은 프랑스보다 10배나 낮았기에 경찰들은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렇기에 아랍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은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검문소를 지날 때면 그들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차를 세우고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벌금”을 빙자한 뇌물을 요구했다. 환율을 계산해 보면 정말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변함없었다.
우리 가족이 외식을 한다던가 혹은 밖에서 볼일을 봐야 할 때면 아버지가 운전을 맡아서 하셨는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인종차별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순히 우리에게 관심을 표한 것이다) 우리 차에 돌멩이를 던져 위험할 뻔한 순간은 상당히 많았다. 차가 막혀 도로 위에 차가 세워져 있을 때면 어린아이들이 달려와 차 안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온갖 동양인 차별적 제스처를 취하며 “칭챙총“을 외치는 건 아직도 나에게 작은 트라우마이다. 이외에도 온갖 시비와 무차별적 인종차별에 시달리기에 나와 우리 가족은 별다른 이유가 없는 한 작은 쉘터와 같은 안전지대인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당시 나오던 “KBS WORLD”라는 재외국민들을 위한 한국의 유일한 티브이프로는 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는 것, 혹은 놀이터에 가서 뛰어노는 것은 나에게는 저 멀리 공상과학 프로그램에 나오는 우주선 혹은 우주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작은 나에게는 작은 레고 블록 몇 개와 KBS WORLD, 그리고 커다란 등을 갖고 있는 아버지와 늘 따듯한 엄마가 나의 세상 전부였다.
테러의 위협도 위협이지만, 내비게이션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절 지도로만 길을 찾아다녀야 하는 게 알제리였다. 표지판도 신호등도 차선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에서 차를 운전하며 다닌 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그나마 있는 표지판도 전부 아랍어로 쓰여 있었기에 대다수의 외국인들은 전담 기사를 고용해서 살았다. 우리도 같은 처지였기에 전담 기사를 채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가까운 알제리 사람이 생겼고, 그의 이름은 모크타르, 줄여서 ”목탄“이라고 불렀다.
목탄의 첫인상은 아직도 늘 기억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왁스를 듬뿍 발라 넘긴 꼬불한 검정 머리, 젊은 얼굴과 턱수염에 큰 키를 갖고 있었다. 어린 내가 얼핏 보아도 젊은 청년이었다. 늘 진청바지와 검은 반팔티를 입고 다녔는데, 그보다 나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그의 환한 웃음이었다.
목탄은 전형적인 알제리 서민층이었다. 아저씨는 전기기사를 공부했다고 했지만, 당시 임금의 차이가 있으니 외국인 가정 전담 기사 겸 통역사로 일하는 게 경제적으로 훨 이득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알제리 사람들을 너무나 싫어했지만,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알제리 아저씨는 목탄이 처음이었다. 그는 차별이 없었다. 신실한 무슬림 신자로서 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했고 실천을 했다. 어린 나를 보며 늘 환하게 ”대이완~“이라 불으며 나를 반겨주었고 그럴 때면 나도 웃으면서 ”목탄! “이라고 소리쳐 안겼다. 아저씨는 어린 내가 귀여웠었나 보다. 키도 작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 통통한 내가 아저씨에게는 조카 내지는 아들처럼 보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늘 우리 가족을 사랑으로 대해줬다. 본인의 땅에 찾아온 이방인에게 친절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 말이다. 그는 모든 일을 기쁨으로 했고 늘 순수한 웃음을 갖고 살았다. 나는 목탄 아저씨가 출근할 때쯤이면 베란다에 나가 아저씨를 기다렸고, 이내 아버지가 출퇴근에 쓰라고 사준 빨간 스쿠터를 타고 아저씨가 골목을 지나올 때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목탄아저씨도 웃으며 손 인사로 화답해 주었다.
목탄아저씨와 보내는 시간은 많았다. 우리 학교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맞다 필자는 전학을 갔고 이 전 학교에서는 1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을 보냈다). 차로 2시간여 거리에 있었고, 목탄 아저씨는 비몽사몽 한 우리를 태우고 늘 학교로 바래다주었다. 오후 4시 30분에 학교가 끝날 때면 목탄아저씨는 늘 우리를 기다려주고 우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아저씨는 차에서 늘 한국 노래를 틀어주었다. 고향을 그리워할게 뻔한 것을 알아서 그런 건지, 그렇게 먼 땅에 사는 어린 누나와 내가 안쓰러웠는지 우리와 같이 한국 노래를 듣고 부르고 그 가사를 알려달라 하면서 우리의 등하굣길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었다. 당시 알제리의 급식 사정은 위생적으로 형편이 없어 우리는 밥을 굶는 일이 허다했다. 화장실의 상황은 형편없기에 화장실에 안 가려 물을 하루 종일 안 마시는 건 일상이었다. 아침만 먹고 점심을 굶으니 나는 허기 가졌고 매번 하굣길에 아저씨에게 케밥을 사러 가자고 조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단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투정을 받아줬다. 집에 도착하면 늘 나에게 ”누가 먼저 올라 가는지 내기할래?” 라며 계단 오르기 대결도 했었다. 아저씨를 이긴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씩씩대며 “아저씨는 다리가 길어서 그런 거야!”라고 하면 목탄 아저씨는 나에게 “대환도 크면 나보다 빠르게 올라갈 거야! “라고 환한 미소로 답 해 주었다.
나는 아직 종종 계단을 빠르게 오를 때면 그때 내 무거운 책가방을 대신 들고 계단을 오르던 목탄 아저씨가 생각이 나고 그리움이 곧장 찾아온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제는 나도 계단을 아저씨만큼 빠르게 올라갈 수 있어요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이번 생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뒤이어 찾아올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시큰해진다.
”목탄”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옹클 목탄!” (목탄삼촌)으로 변했었다. 그 알제리인 더 이상 나에게 아저씨가 아니라 가족 같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목탄 삼촌을 늘 가족처럼 대해주며 “넌 우리의 가족이랑 다름없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럴 때마다 “으아~! 제가요!? “라며 얼굴이 빨개지며 머리를 머쓱하게 긁던 아저씨 그렇지만 늘 환한 미소는 같이 한채. 그는 자연스레 우리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우리와 몇 년간 동고동락 한 아저씨가, 그 환한 미소를 한 아저씨가 어느 날 착잡한 얼굴로 우리 집에 들어섰다. 나를 보며 애써 웃지만 그 뒤에 숨겨진 슬픔이 나는 당시에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저씨는 아버지의 사무실에 들어간 뒤 사직서를 꺼냈다 했다.
목탄 아저씨는 우리와 계속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혼할 여자가 생겨 이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데, 기사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할 것 같아 많은 고민 뒤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시급을 올려줄 테니 계속 함께 하자고 했지만 목탄 아저씨는 소위 말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상대 여자가 원하기에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며 미안함과 아쉬움을 내비쳤다고 했다. 목탄 아저씨는 나에게 ”대이완~ 그동안 같이해서 너무 즐거웠어 “라는 말을 건넸다. 아저씨는 내가 길에서 인종차별을 당할 때면 늘 달려와 아이들을 쫓아주고는 나에게 괜찮냐며 달래주었다. 저 애들이 뭘 몰라서 그런다며 대신 사과해 준다 했다. 마지막 하교날 나는 울음을 참았지만 닭똥 같은 눈물을 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목탄 아저씨도 울음을 참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나는 목탄아저씨에게 그냥 계속 같이 나랑 학교 다니면 안 되냐고 떼를 썼다. 아저씨는 애써 웃으며 나를 안아주고 달래주기만 했다. 아직도 거친 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주고 또 나를 쓰다듬어 주던 목탄 아저씨의 손길은 생생하기만 하다. 어린 동양인 아이가 무엇이라고 아저씨는 나를 그렇게 예뻐해 주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언어의 장벽도, 정서적 장벽도, 문화의 장벽도, 아저씨와 나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는 삼촌과 같은 소중한 존재로 남았었다. 10살 어린 나에게, 목탄 삼촌은 알제리에서 나의 삶의 버팀목이었다.
아저씨는 떠나기 전 우리 집의 전기를 고쳐주겠다며 하루 종일 일을 했다. 나는 아저씨와 헤어지기 싫어 아저씨 옆에 꼭 붙어 졸졸 따라다녔다. 얼굴은 서운함이 가득한 채로 말이다. 아저씨는 묵묵히 일을 했다.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채로 말이다. 아저씨가 일을 얼추 끝냈을 때는 이미 날이 진 상태였다. 아저씨는 나와 같이 현관 구석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응원과 격려 그리고 따듯한 마지막 인사말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별이 서운했기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꼭 아저씨 옆에 붙어 마지막 순간을 보냈다. 환한 미소 대신 아쉬움이 가득한 목탄 아저씨의 얼굴. 작은 등 하나만 비추고 있는 그 현관 속 보이던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나에게 처음으로 풍선껌을 부는 방법을 알려준 아저씨 생각에 나는 아직도 풍선껌을 씹지 못한다.
목탄은 그렇게 우리 집을 떠났다. 스쿠터 키를 반납하려는 것을 아버지는 ”어차피 너 출퇴근을 위해 산거였어, 그러니까 네가 꼭 가져가 “라며 작별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처음으로 사랑한 목탄 삼촌의 결혼 선물로 티브이와 가장 최신형 냉장고를 선물로 사주었다. 목탄은 연달아 받을 수 없다며 ”무슈 무슈 안 그래도 돼요!” 라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한국에서는 꼭 결혼 선물을 줘야 한다는 핑계로 선물을 사주었다. 아저씨는 우리를 마지막으로 본인 집에 우리를 초대해 극진히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알제리에서 서민이 그리고 알제리인이 대접할 수 있는 최선의 가장 좋은 음식들을 가득히 차려놓고 우리와 마지막 식사를 나누었다. 아저씨의 얼굴은 여전히 따듯했고 풍요로웠다. 마지막까지 환한 얼굴로 우리를 따듯하게 대해주었다. 평생의 짝 옆에 앉은 아저씨는 더욱 밝고 풍요러워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아저씨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마지막 저녁식사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알제리인 목탄 아저씨를 그날 이후로 다시는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