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너 중국인이야?

내가 모노톤인 건지 아님 너희들이 모노톤인 건지

by 대환


책가방과 개구리 파우치

아무리 환경이 어렵다 한들, 학교는 다녀야 했다. 당시 내가 처음으로 간 초등학교 (필자는 살면서 전학만 7번을 다녔다)는 집에서 걸어서 약 10분 정도 거리였다. 현재까지도 기억에 나는 것은 8살 때 엄마의 손을 꼭 붙들고 차도와 인도의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거리를 걷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흩날리던 먼지도). 엄마 손을 잡고 걷다 보면 옆에서 덤프트럭이 슈웅 지나가는데, 차가 달릴 때 공기저항을 뚫는구나를 몸소 배웠던 순간이었다. 왠지 고개를 돌리면 내 코가 잘려나가지 않을까 걱정돼서 앞만 보고 걸었다.

학교의 시설은 드라마틱하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사립학교를 다녔는데, 다른 이유보다는 국립 학교는 정말이지 학교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학생 인권은 말할 것도 없고, 급식실에서 바퀴벌레나 쥐가 돌아다니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립학교가 있었다. 오전에는 프랑스어 오후에는 아랍어를 가르쳤고, 교과과정도 지금 보면 나름 괜찮았다.

대략 이런 분위기(?)

그렇다고 사립학교라고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을 구타하는 등의 문제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니게 된 학교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우선 프랑스어나 아랍어를 한 마디도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가장 어려웠다. 당시 기억나는 것은, 강박적으로 프랑스의 영향력을 떨쳐내고 싶은 알제리는 주말이 다른 날들과 달랐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한 “토요일 일요일”이 거기서는 “금요일 토요일”이었다. 그래서 ‘불금’이 아닌 ‘불목‘이 있었다. 이렇게 요일부터 언어까지 정말 그 무엇 하나 작게라도 나에게 익숙한 것은 부재했다.

학교의 유일한 검은 머리 동양인이었던 나는 당연하게도 다수의 주목을 받았다. 또, 당시 부모님의 신분이 신분이었던지라 나 또한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특히나 외적으로 눈에 띄는 동양인이기에 더욱 안전에 신경을 쓰어야만 했다. 당시 나는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비상상황 (다치게 된다던가 혹은 아플 때)을 대비해 엄마는 당시 나에게 개구리 모양 파우치에 프랑스어로 적힌 비상 연락망과 문구 몇 가지를 적어주셨다.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께 보여주라고 말이다. 다행히 그 쪽지를 선생님에게 보여드리는 상황은 찾아오지 않았다.

불어를 한 마디도 못하니 나에게는 쉬는 시간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해방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당시 대부분의 학교는 프랑스식 시간표를 따랐었다. 그래서 항상 오전 10시에 30분, 오후 3시에 30분, 이렇게 2번의 쉬는 시간 « récréation »이 있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어도, 아랍어도 한 마디도 못하는 나에게 30분은 꽤나 힘든 시간들이었다.


쉬는 시간

​​

당시 30분은 상당히 길게 느껴졌다. 그 당시의 알제리는 상당히 폐쇄적인 국가였기에 외국인의 숫자가 상당히 적었었다. 그렇기에 학교 운동장에 나타난 검은 머리 외국인은 여러 아이들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순수하게 말을 거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지만, 멀리서부터 뛰어오면서 내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치는 학생, 뒤에서 한 번 쿡 찔러보고 도망가는 학생. 씩씩거리는 반응이 재밌었는지 단체로 와서 툭툭 건드리는 학생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 나는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 대상이었고 학교 측에서도 나의 존재를 잘 알고 있으니 그럴 때면 선생님들이 와서 나를 보호해 주기는 했지만, 그럴 때면 매번 집에 가 엄마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래서 어린 나는 쉬는 시간이 되면 구석 한쪽으로 혼자 가서 그 무료한 시간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서서 손장난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나의 작은 습관은 개방된 공간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벽에 몸을 붙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래야 누군가 내 뒤에 와서 내 뒤통수를 안 때릴 테니까.


당시 나는 숨어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환에서 다이완, 디환으로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필자의 실명은 “대환”이다. 한국어로 쓸 때도 “대한”으로 자주 착각하는데 외국어로는 어떻겠는 가?

당시만 해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지도가 오늘만큼 높지는 않았다. 대략 아시아=중국 정도로 생각할 때였으니 말이다. 안 그래도 “꼬레”라는 나라 이름도 생소한데 한국 이름은 더욱 생소했을 것이다. 그러니 현지인들 입장에서 “Daehwan”이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여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구들도 내 이름을 부르기 쉽지 않아 했지만, 선생님도 내 이름은 정말 어려워했다.


대략 출석을 부를 때면 매번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

출석 부른다~
아담~ 네!
함자~ 네에
ㄷ…디완?
…..네



출석을 부를 때마다 3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매번 박스 안에 들어가 숨고 싶었다. 지금에서야 웃고 넘어가지만, 8살 때 나의 소원은 투명 인간이 되기를 원했을 정도로 스트레스였다. 어린 나는 그게 그저 “비웃음” 혹은 “비아냥”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다름을 이해하기에는 나도 그들도 너무 어렸으니까 말이다. 다름을 받아들이기 위한 성숙함은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첫 학교에서, 첫 이국 땅 사회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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