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렇게 오래 떠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머무른 기억의 부재 속 나는 떠날 준비를 했다.

by 대환

​8살, 알제리로 떠나다

아주 어린 나이에 나는 한국이라는 땅을 떠나 지구 반대편 알제리라는 나라에 도착했다.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몸집만 한 여행 가방을 끌고 난생처음 와 보는 인천공항에서 남겨진 가족들의 눈동자 속 떨어지는 눈물방울의 의미도 모른 체, 커다란 비행기를 탄다는 설렘 하나로 의기양양하게 비행기에 탔었다. 당시 나는 이 “여행”이 이렇게나 오래 걸릴 줄은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2007년 7월, 무더운 어느 여름날,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이라는 나라를 떠났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들어보지도 못한 머나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었고, 어린 소년은 마냥 모든 것이 신기했었다. 여행을 떠나기에 안전하지도 않으며, 음식이 썩 입맛에 맞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날씨가 퍽 좋은 나라도 아닌 그런 곳. 상상만 해도 아름다운 야경이 아른거리는 파리도, 홍콩도 아닌 그런 나라, 알제리.

착륙 직전 창밖 풍경이 아직 기억에 남는다. 짓다 만 건물들, 유리 없는 창문들, 페인트칠도 제대로 되지 않은 집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건 흩날리는 사막의 무수한 모래알들이었다.

내 기억 속 알제리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장소다

모든 게 낯설었다, 8살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낯선 환경이었다. 특이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주위에서 들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들, 공항 곳곳에 배치된 군인들. 낯선 환경 속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곤 커다랗고 듬직 한 부모님과 누나였다.


2007년 당시 알제리의 사정은 녹록지 못했다. 2001년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이슬람 무장단체 알카에다에 의해 자행된 9/11 테러를 기점으로 서방 국가들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 활동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그리고 내가 알제리로 가던 당시 CIA와 여타 다른 첩보기관들은 UBL (Usama Bin Laden)을 추적하고 있었고 당시 첩보에 의하면 UBL의 본거지가 알제리 일 수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와 같은 서유럽 국가들과 근접하다는 지정학적 요인. 그 외에 수많은 요소들은 알제리라는 나라가 얼마나 당시에 요주국가 중 하나였는지 설명하기 쉬워진다.


그렇기에 한국과 달리 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주하는 풍경은 안정하고 평화로운 한국과 크게 대조될 수밖에 없다. 카키색 민무늬 전투복을 입고 검고 두꺼운 군화를 신은 채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턱수염이 풍성한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돌아다니며 경계근무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알제리의 도로 위 아스팔트들은 관리가 되지 않아 파인 곳이 많았고 차 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30분 전까지 4차선이었던 도로가 8차선, 12차선이 되는 광경은 일상이었다. 길에는 중무장 한 헌병들의 검문소가 즐비 해 있고, 부르카를 두르고 다니는 여성들을 마주치기도 일상이다. 그나마 소수의 외국인들이 즐겨 가는 식당과 호텔들 앞에도 권총과 자동소총을 들고 있는 경비원들이 늘 있었다. 이 부분은 이해가 쉽게 되는데, UBL의 근거지가 아닐지라도, 북아프리카 지역 내 알카에다의 주 활동지가 알제리 그리고 그 수도 알제는 그들에게 좋은 표적이기도 했다. 하루에 2-3번 정도의 자살 폭탄 테러가 늘 있었고, 내가 살던 당시 미 대사관을 표적으로 자행된 자살 폭탄테러 사건도 있었으니, 당시 알제리의 치안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강 감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나라에서 살아가야 했다.


낯선 땅에 녹아들다.


습함은 빠지고 더운 열기만이 가득한 땅에서 정착해 살아간 시간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모든 것이 신기하면서도 어린 나에게는 감당이 벅찬 낯선 나라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나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해도 견디기 어렵고 감당하기 벅차련만, 어린 나는 오죽했을까?

낯선 땅에 정을 붙이고 녹아들어 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어려움을 꼽으라 하면 역시나 많은 것들의 부재였다. 국교가 이슬람인 국가이기에 돼지고기나 이에 비롯된 수많은 가공식품들은 일절 금지되었었다. 우리가 매일 비교적 간단히 접할 수 있던 돼지고기가 없다니! 상상이 가는가? 오늘 당장 돼지고기 없이 살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이 머뭇거릴 것이다 (필자가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것도 크게 작용했었다).

알제리는 석유 국가다. 그렇기에 석유 산업에 의존해 많은 것들을 스스로 자립해서 주체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나라다. 그 당시에 대통령인 ‘부트 플리카’는 장기 집권을 하였고, 보수적인 정치인이기에 반 개방 정책을 고수해서 외국 기업들은 알제리에 진출하지도 못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우리가 매일 소비하는 패스트푸드 혹은 스타벅스 더 나아가 가전제품들까지, 그 어떠한 것 하나 구매하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티브이는 또 어떠한가? 나와 나이대가 비슷한 독자들이라면 어린아이들에게 당시 유행했던 ‘투니버스’를 기억할지 모른다. 나는 ‘투니버스’의 열열한 시청자였는데, 아니 무슨 말인가! 알제리에는 투니버스가 없다니!

이러한 것들의 부재는 삶의 의욕과 더불어 일말의 재미 또한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밖에 나가 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밖의 치안 사정은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검은 머리 동양인 꼬마는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지금 회상해 보면 그때 당시 우리 가족이 즐길 수 있던 여가라고는 당시 출국 전 외장 하드에 잔뜩 다운로드했었던 최신 드라마를 무한 재생하는 것이었다. 매일 같은 것을 시청했지만, 어찌나 즐겁던지 아직도 그때 그 작은 거 하나에 감사하며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면을 통해서나마 ‘한국말’을 들을 수 있고 머나먼 그리운 땅을 바라볼 수 있던 것이 너무나 즐거웠던 게 생각난다.



학교에 진학하다


알제리에 막 도착했던 건 2007년 여름이었다.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였던 알제리였기에, 대다수의 학교 시스템은 프랑스의 시스템을 따라 진행되었었다. 그에 따라, 어느 정도 일상에 적응할 무렵 나는 부모님의 손을 붙잡고 난생처음 알제리의 학교를 갔었다.

2007년 9월,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은 8살 동양인 꼬마는 집에서 걸어서 대략 10분 정도 떨어진 학교에 갔었다. 입학식 날이었고, 이날은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날로 나는 기억한다.

입학식 날, 아버지는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으셨었다. 내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아빠의 손을 꼭 붙잡고 학교에 갔었다. 간단한 입학식이 끝나고 나는 운동장 한구석에서 아빠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선생님들이 하나 둘 아이들을 데리고 갈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어린 나는 무엇이 그리 겁이 났었을까? 이제 아빠 손을 놓고 ‘나 홀로’ 이 학교에 적응해야 하는 순간, 아니 더 나아가 앞으로 고등학교까지 그 누구도 의지하지 못하고 낯선 외국인 학생의 신분으로서 학교의 적응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예지라도 하였든 두려움에 휩 쌓였었다.

나의 왼손은 아빠의 큰 손을 붙잡고 서 있었고, 작은 두 눈망울은 터져 나오기 직전의 눈물을 있는 힘껏 참고 있었다. 마치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톡 건드리면 금세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나는 커다란 아빠를 올려다보았었다. 이상하게도 아빠는 나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빠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마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나의 메시지는 분명한 “아빠, 나 집에 가면 안 돼요? 너무 무서워요. 나 혼자 견딜 수 있을까요?”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빠를 향한 나의 두 눈은 정확히 위문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빠는 무심하게 나의 손을 놓으셨다. 그러고는 묵묵히 학교 밖으로 나가셨다. 그 당시 나는 이 순간이 이해되지 않았었다. 아빠가 너무나 매정했고, “왜 아무 말 없이 나를 거기에 홀로 두셨을까?”에 대한 의문을 평생 품고 살았었다.

20살이 되던 해, 나는 아버지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입을 여시고 하신 말씀은 나의 지난날 속 큰 상처와 의문을 씻겨 주었다. “그때, 너를 학교에 두고 가기 너무나 힘들었어. 나도 낯선 외국 땅에서 적응하기 어려운데, 너라곤 오죽했겠니? 네가 글썽이며 나를 쳐다볼 때 아빠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음을 숨기고 있었단다. 그렇지만, 어떡하겠니. 가야만 하는 것을. 그때 뒤돌아서 나오지 않았으면 나는 너를 못 놓았을 거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이때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쓰는 이 순간에도 벅차올라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그러고 아버지가 말을 덧 붙이시기를 “그렇게 너를 혼자 학교에 남겨두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무겁던지. 아직도 기억나, 울면서 집에 돌아왔단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저렇게 작은 아들을 학교에 두고 와야 한다는 사실에 말이야.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며, 무기력감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밖에 없었단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었어. 하나님,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주의 손에 맡깁니다. 당신의 아들을 하늘의 아버지에게 맡깁니다. 부디 보살펴주소서.”

지금에서야 그때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당시에는 크고 믿음직한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 막 40살을 넘긴 초보 가장이자, 낯설고 두려웠던 어른이었음을.

그렇게 나의 다사다난 한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언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들까지. 무슨 일이 생기면 선생님께 꼭 보여드리라던 엄마가 챙겨주신 핸드폰과 쪽지, 비상약 그리고 공책들까지. 동양인이라며, 혹은 중국인이라며 놀리던 개구쟁이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들과 놀림까지.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들. 그곳에서 나는 ‘홀로서기’를 차금 차금 배우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첫 이방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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