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나는 3개월 전부터 헝가리의 자동차 판매를 지원하기 위해 장기출장 중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헝가리 생활에 적응해 갈 무렵이었다. 어제저녁 헝가리 자동차 판매 법인장이 식사를 하면서 하던 말이 기억이 났다.
“본사에서 루마니아 흑해에 위치한 대형 조선소를 인수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김 과장이 현지로 발령이 날 것 같네.”
“제가 조선소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답답합니다.”
약간의 짜증스러운 내 목소리에 법인장은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 회사가 언제는 전문가를 보냈나? 일을 하다 보면 전문가 되는 거지.......”
이미 본사에서 법인장에게 통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다뉴브 강의 물줄기는 굽이굽이 흑해를 향해서 흐르고 있었다. 독일의 알프스 산이 발원지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거치는 다뉴브 강은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어우러져서 루마니아에서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200년 동안 로마의 식민지로 기나긴 시련과 고통 속에서 살아온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렇듯 자신들의 민족사와 유사한 다뉴브 강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비행기가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오토페니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왔다.
공항에서 입국심사를 하면서 처음 본 흰색 정복의 입국심사관이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두웠던 시절을 잊어버린 듯 그의 얼굴에서는 밝은 모습이 역력하였다. 처음 본 루마니아 사람들의 모습은 로마의 오랜 식민지 지배로 이태리 사람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공항 입국심사를 마치고 출구로 나오자 내 이름이 쓰인 팻말을 들고 서 있는 루마니아 현지 직원을 발견하였다.
“부너지우와?(안녕하세요?)”
처음 들어보는 언어가 생소하게 느껴졌으나 그 의미는 알듯하였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 배운 말이 생각이 났다.
“물츄메스크(고맙습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한적했다. 어릴 적 고향 길을 가듯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 우마차가 처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길을 재촉하는 마부의 마음과는 달리 소는 느린 걸음으로 마부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마부의 골 깊은 주름진 나이테만큼이나 지난 24년간 ‘차우세스쿠’ 시절 장기집권의 암울했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찬바람이 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거리에 하얗게 덮인 눈들이 스산한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던 부쿠레슈티의 ‘개선문’이 내 시야로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현지 자동차 딜러 사장인 블레어 씨가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내가 임시사무실로 사용할 곳을 안내해줄 것이다. 내가 묵을 B호텔 바로 건너편에 있는 회사 빌딩은 주위의 다른 건물에 비해서 오래되지는 않은 듯 비교적 깨끗해 보였다. 시내 중심가는 부쿠레슈티 대학 캠퍼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사무실 주변은 학생들의 움직임을 제외하고는 조용하고 평온해 보였다.
작은 계단을 통해서 올라 간 2층 임시사무실은 새로 단장한 듯 실내 인테리어가 건물 외부에 비해 깨끗했다. 사무실에서 나를 반가이 맞이해주는 직원들은 한국의 회사 동료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줬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블레어 씨는 친한 친구를 만난 듯 자연스럽게 나를 환대해주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비행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서 피곤한 줄 모르겠습니다.”
그는 내가 일했던 헝가리 자동차 판매 사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물어왔다.
“동구(東歐) 시장의 판매량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루마니아 시장도 좋아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말을 아끼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블레어 씨로부터 루마니아 자동차 판매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받고 판매대금 회수 방안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다. 본사에서는 이미 블레어 씨의 회사를 통해서 1,000대의 완성차를 공급하여 판매 중에 있었다. 나는 판매대금 회수가 되지 않아 조기 회수를 하라는 본사 지시로 머리가 아팠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이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건 때문이었지만, 자동차 판매 대금회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블레어 씨도 대금회수의 압박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창 밖에는 회색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블레어 씨는 전 루마니아 레슬링 국가대표선수 출신으로 몸집이 건장했고, 생긴 모습이 전형적인 유태인이었다. 선배들은 유태인이 비즈니스를 하는데 까다로운 상대라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들려주었다. 블레어 씨는 내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나를 편안하게 해 주려는 태도가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블레어 씨는 이번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작업을 도와주면서 자신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루마니아 인맥을 이용하면서 루마니아 독점 자동차 판매 사업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내 귓전을 스쳐갔다.
아침에 본사와 교신하기 위해서 나는 사무실로 갔다. 낙후된 루마니아 통신사정으로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사전에 요청을 했었다. 팩스는 전화선과 같이 사용할 수 있어서 본사와 업무 협의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예상대로 본사에서는 빠른 시일 내 현지에 지사를 등록하고 사무실을 확보하고, 자동차 판매대금을 조기 회수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을 위한 산업부 장관과 대통령 면담을 주선하라는 지시도 내려왔다. 2주 후에 본사 회장 일행이 현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본사에서 알려준 현지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을 주선한 바담 씨에게 전화를 했다. 바담 씨는 전직 루마니아 외교관 출신으로 해외 여러 나라에서 대사를 역임하였고, 얼마 전에 은퇴를 하였다. 현지 조선소는 루마니아 정부가 10여 년 전부터 운영했으며, 흑해 연안에 있는 배들을 건조하거나 수리하여 왔다. 정부에서는 경영상의 문제와 빈번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장기적인 적자를 보고 있는 조선소를 인수할 회사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바담 씨로부터 그러한 정보를 입수한 본사가 인수 검토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본사에서는 이번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흑해에 해외 전진기지를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담 씨가 약속한 호텔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육십이 넘어 보이는 중후한 모습의 백발 노신사였다. 그는 오랜 외교관 생활로 자상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오늘 본사에서 2주 후에 회장 일행이 루마니아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급박한 일정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곧바로 본론부터 들어갔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루마니아에는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려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나의 성급함에 그는 여유롭게 받아치며 말했다.
“산업부 실무진과 면담을 주선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이번 주에 그들과 만나서 본사 회장 일정에 대해서 논의하였으면 합니다.”
우선 실무부처와 기본적인 협상 일정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번 사업의 빠른 진행을 위해서 회장 일행 방문 시 산업부 장관과 대통령 면담도 함께 요청드립니다.”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이미 산업부와 협의 중에 있습니다. 진행 결과는 내일 중으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는 외교관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당황하였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 그는 이미 불을 지펴놓은 것이었다. 이제는 끓을 물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인사를 나눈 후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담 씨와 면담 내용을 본사에 팩스로 보고했다. 한국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저녁식사를 위해서 숙소 주변의 음식점을 둘러보았다. 알 수 없는 내용의 간판들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늦은 밤 시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과장된 듯 한 제스처를 쓰면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라틴문화를 가지고 있는 루마니아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저녁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이태리를 방문했을 때 노천카페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내용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하던 그런 익숙한 분위기였다. 지나가는 나에게 손짓하는 카페 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카페 주인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듯했다. 노천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혼자 있는 나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거리는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부쿠레슈티의 밤은 다시 적막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 처음 맞는 주말은 평온했다. 아침 일찍 바담 씨가 부쿠레슈티 근교에 있는 ‘시나이아’ 수도원 관광을 가자고 나에게 연락이 왔다. 겨울인데도 쌀쌀할 뿐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나는 바담 씨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한국의 60년대의 분위기를 풍겼다. 부쿠레슈티를 조금 벗어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거대한 숲과 넓은 농지들이 줄지어 스치고 지나갔다. 도로에는 오래된 차들이 매연을 뿜으며 느릿느릿 달려가고 있었다. 하얀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이 한두 개 빠진 치아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을 때면 순박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병풍처럼 다가오는 산들을 지나 계곡으로 바뀌면서 자동차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몇 구비를 거쳐서 올라가는 길은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해주고 있었다. 산 정상의 나뭇가지에 피어 있는 눈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날아오르는 새들은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비행하고 있었다. 험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탄하지도 않은 ‘시나이아’로 가는 길이었다.
한참 차 창밖 풍경을 즐기고 있는데 바담 씨가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한국은 민주화 과정이 잘 진행이 되고 있나요?”
한국은 최초의 민간정부가 들어서려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며칠 후에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이 열릴 예정이었다. 바담 씨가 이런 한국의 상황을 알고 물어보는 듯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30여 년간의 ‘차우셰스쿠’ 독재 시절을 겪은 바담 씨는 나름대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외교관으로 해외를 다녔고, 여러 국가의 외교관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향후 루마니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 그였다. 바로 그런 시점에 바담 씨를 만난 것은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와 나누던 정치 관련 대화는 자연스럽게 현재 추진하고 있는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문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 조선소 인수 건에 대해서 정부의 분위기는 어떤지요?”
나는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지분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회사에서 투자할 금액이나 방법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정부는 이번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건에 대해서 사활을 걸고 있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성사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바담 씨는 상당히 외교적인 답변을 했다. 그가 현재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중요한 정부 관계자와의 인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외교관들의 특성을 알고는 있지만, 바담 씨를 우리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는 해외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결국 우리에게 협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번 회장 일행 방문에 대해서 대통령에게도 보고가 되어있는지요?”
회장이 방문하는 자리에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틀을 만들어 놓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현재 기본 일정에 대해서 보고가 끝났고,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다음주초까지는 확정된 일정이 나올 것 같습니다.”
바담 씨의 외교적인 발언 뒤에는 명쾌한 답변이 항상 따랐다. 그는 이번 ‘시나이아’ 관광도 마음을 연 상태에서 일정 조율을 협의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본사에서는 일정을 빨리 확정하라는 재촉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회장 일행 방문 시 협상 내용에 대해서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협상 내용에 따라 준비할 사항도 명확해질 수 있었다.
“이번 방문 기회에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조건들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합의가 되었으면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업이 빨리 진전될 것 같습니다.”
나의 일방적인 요구사항을 경청만 하고 있던 그는 웃으면서 지난번 속담을 말해주었다. 처음으로 그와 나는 크게 웃었다.
‘시나이아 수도원’은 300여 년 전에 세워졌으며, ‘시나이아’ 지명도 이 수도원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루마니아의 종교는 루마니아 정교가 87%를 차지하여 전국에 많은 수도원들이 있고, 바담 씨도 루마니아 정교를 믿고 있다고 했다. 수도원 내부에는 수많은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외관에서 보는 하얀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조금 어두우면서 경건한 분위기였다.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카를 1세’는 이곳에 여름 별장으로 ‘펠레슈 성’을 지었다고 했다. 높이 솟은 첨탑은 마치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다. 목재와 그림이 함께 섞인 독특한 외관은 특이한 건축양식이었다. ‘펠레슈 성’은 주변의 자연경관과도 자연스럽고, 조화롭게 잘 어우러져있었다. 저 멀리 카르파티아 산맥이 내려다보이는 여름궁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었던 루마니아에 대해서 ‘펠레슈 성’을 관람하면서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잘 간직한 채 동유럽의 고요한 나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차로 3시간 정도 부쿠레슈티에서 동쪽으로 따라가면 루마니아의 최대 항구인 ‘콘스탄차’가 나온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흑해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불가리아와 접경지역에 루마니아 최대 조선소인 ‘망만갈리아 조선소’가 있다. 차가 시내 입구로 들어서면서 도시는 흑해를 따라서 보이던 화려한 리조트들과는 달리 한산하고 침체된 분위기를 느꼈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부쿠레슈티의 활기찬 모습에 비해 다소 무표정해 보였다. 문을 연 가게에도 손님 없이 주인만 고개를 떨어트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본사에서 협상을 위해서 온 실사 팀 일행들은 긴 여행으로 피곤해 보였다. 그들은 이번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을 성공시키려는 의지로 모두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난달 회장 일행이 방문했을 때 언급되었던 합작회사 설립을 위한 실사 팀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한 직후였다. 회장 일행들의 방문 때 대통령 면담에서도 루마니아 정부의 강력한 투자 요청과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한 상황이었다. 현지 조선소의 경영진과 루마니아 정부에서 파견된 산업부 직원들이 본사에서 온 실사 팀을 맞이하기 위해서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현지 조선소에서는 본사의 실무팀을 맞이하기 위해서 계약 준비를 위한 법무팀, 공장 설비와 운영 실태를 확인할 생산팀 그리고 회사 재무현황을 점검할 재무팀으로 구성하였다. 본사에서는 조선소 담당 부사장이 총책임자로 선임되었다.
‘망갈리아조선소’는 현지 지역주민들 대다수가 이 공장에서 근무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만약 회사에서 이 공장을 인수를 하게 되면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문으로 벌써부터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에서도 직원 전원승계를 조건으로 요청하고 있었으며, 이 문제는 향후 벌어질 구체적인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이 될 것이었다. 본사에서도 이런 점을 간과할 수 없어서 협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장의 실사 금액과 지분율이 결정된 후 상정할 수 있는 투자금액이었다. 실사팀의 숙소는 조선소에서 좀 떨어진 게스트하우스였다. 루마니아 전통 건축양식인 뾰족한 모습들의 지붕과 중세 유럽풍으로 지어진 3층 건물로 조용하고 아늑하였다.
이세영 변호사는 조금 전 전체회의를 마치고 심각한 표정으로 조선소에서 주최한 만찬 상석에 앉아있었다. 그는 회사의 해외공장 인수 전문 변호사로 국제계약서를 검토하고, 최종 승인을 본사로부터 받을 때까지 협상의 주역이었다. 그동안 많은 해외공장 인수 경험을 통해서 회장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이번 인수 건에 대해서는 본사로부터 반드시 성사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탓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만찬이 시작되면서 세르지우 조선소 사장이 인사말을 하였다. 그는 산업부에서 근무하였으며, 조선소 설립 시 실무책임자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장이 되었다. 60대 초반의 그는 전형적인 관료 출신처럼 능숙한 제스처로 분위기를 유도해 나갔다. 전체 참석인원이 40여 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는 바담 씨도 앉아있었다. 루마니아에서 생산되는 와인을 곁들인 만찬은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과 함께 흥겨운 분위기로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세르지우 사장은 참석자 자리를 돌면서 인사를 하였다, 이세영 변호사 자리에 와서는 더욱 친근감을 나타냈다. 이미 그는 이세영 변호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르지우 사장의 인사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으로 건배를 하면서 이세영 변호사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이번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에 사장님의 많은 협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조선소 인수에는 미국의 경쟁회사가 있었고, 세르지우 사장이 미국 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다. 이세영 변호사는 현지 국제변호사인 시모나 씨를 선임하여 조선소 합작회사 계약서 초안을 만들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은 현지법이 허용하는 해외 투자자의 지분율과 투자 혜택에 관한 것이었다. 투자자 지분율은 회사 경영의 주도권을 잡는데 중요하였다. 50% 이상의 지분율을 보유해야 경영권 획득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투자 혜택은 처음 3년간은 감가상각비용 등으로 회계상 적자가 날 수가 있고, 생산 초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세제감면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현지 변호사인 시모나 씨도 이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정부에서 얻을 수 있는 투자 혜택에 대해서 관심을 하고 있었다.
실사 마지막 날 부사장의 다급한 회의 요청이 있었다. 회장이 모종의 지시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하였다. 이번 인수 건의 분수령이 될 수 있는 내용이 회의석상에서 나올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돌았다. 내 앞에 놓인 물 잔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실무자들의 시선은 부사장의 움직임에 따라 옮겨가고 있었다. 이번 인수 작업의 핵심은 계약서 작성이라는 것을 이세영 변호사도 잘 알고 있었다. 영국 신사 같은 단정한 외모와 상대를 배려해주는 매너에 대해서 루마니아 측 변호사들은 그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그는 매끄러운 협상을 이끌어냈고, 아직은 큰 변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300조 항이 넘는 계약서의 핵심은 많은 투자 혜택을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받는 것이었다.
“현재 실사팀과, 재무팀에서 보고 결과를 봐야 하겠지만 저는 출장을 좀 더 연기해서 투자 혜택을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받아가야 할 듯합니다.”
이세영 변호사의 단호한 어조에는 자신감이 묻어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산업부 장관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차우셰스쿠 궁전에서 협상 결과에 대한 브리핑을 해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차우셰스쿠 궁전은 북한의 인민궁전을 모방하여 설계된 건축물이었다. 루마니아는 김일성 주석이 두 차례나 열차로 방문할 정도로 양국은 매우 우호적인 관계였다. 차우셰스쿠 대통령의 지시로 북한의 인민궁전보다 더 크게 짓기 위해 공기(工期)를 연장하다가 결국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궁전 옆에는 부인의 이름을 딴 엘레나 궁도 같이 있었으며, 지금은 루마니아 행정부 건물로 사용하고 있었다. 차우세스쿠 궁전의 모습은 거대한 공룡과 같은 건물로 내부를 들어가려면 안내자가 없이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산업부는 4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형 승강기는 정교하게 제작되어 움직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복도는 끝없는 대로처럼 느껴졌고, 천장은 일반건물보다 훨씬 높았다. 복도 중간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면에는 조각이 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그림들이 걸려 있어서 유럽의 궁전을 연상케 하였다.
장관실에 도착하니 세르지우 사장 일행이 실사 팀을 맞이하였고, 산업부 장관이 곧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세르지우 사장은 미국 회사와의 관계로 상당히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좋은 조건으로 지분 매각을 한다는 세르지우 사장의 명분은 있어 보였으나 루마니아 정부 입장에서는 미국과 우크라이나와의 외교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관이 회의실로 들어서면서 웃는 얼굴로 실사팀을 반겼다. 세르지우 사장의 실사 결과에 대한 보고를 끝내자 장관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루마니아 정부를 대표해서 이번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실사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해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실사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장관의 인사말은 부드러웠고, 외교적인 어투였지만 상당히 단호해 보였다.
“루마니아 정부는 그동안 많은 숙원사업들을 진행해 왔으나, 국내의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서 해외 기업들에 개방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 조선소 매각 건을 필두로 해외 투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입니다.”
이번 해외 투자 유치 건이 루마니아 정부로서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인수에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따라서 이번 조선소 지분 매각 건에 대해서 정부는 강력하게 성사를 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정부에서 협력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루마니아 정부에서 본사가 제시한 사항들이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세르지우 사장의 입지는 좁아진 듯해 보였고, 그는 우리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와 잘 협의하여 투자금액과 지분율을 확정하고 루마니아 정부와의 투자 혜택을 마무리하는 것만 남았다.
이세영 변호사를 돕고 있는 시모나 씨는 내가 루마니아에 처음 왔을 때 블레어 씨가 소개해준 국제변호사였다. 회사 설립과 현지 인맥을 연결해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한다고 했을 때 블레어 씨가 회사의 고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50대 초반의 나이인데도 검은 머리와 파란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잘 가꾸어진 몸매로 젊게 느껴졌다. 그녀는 블레어 씨가 만약 이번 조선소 인수 건을 루마니아 인맥을 통해 협조를 해준다면 자동차 판매 독점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저녁식사 같이 하시죠?”
시모나 씨가 작지만 부드러운 어조로 나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같은 사무실에서 여러 번 이야기는 했지만 그동안 어색했던 관계를 개선해보려는 의도인 듯했다.
“제가 좋은 식당으로 예약을 하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는 나를 쳐다보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녀가 나에게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제안을 받아들였다.
4월의 부쿠레슈티의 석양은 짧게 넘어가면서 멀리 보이는 공원의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아직도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부쿠레슈티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헤러스트로공원은 넓은 수풀 속에 커다란 호수가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산책하러 오는 곳이었다. 호숫가 안쪽에 자리 잡은 식당은 오래된 루마니아 전통 양식 건물로 되어 있었다. 하얀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로 치장 한 그녀는 단아하게 보였다. 호숫가에는 오리들이 떼를 지어 유영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녀에게 그동안 조선소 인수 건에 대해서 솔직하게 협의를 하고 싶었다.
“분위기 있는 식당으로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어 지네요.”
“솔직히 블레어 씨와의 관계로 인해서 시모나 씨를 만나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내 말에 그녀도 공감을 했는지 가지런한 하얀 이를 보이면서 밝은 웃음으로 화답을 하였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현재 진행 중인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건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번 조선소 인수 건에 대해서 협력하겠다는 것입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림수프가 그녀의 의상과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제가 협력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방법입니다. 하나는 블레어 씨에게 루마니아 자동차 판매권을 부여하고 협조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산업부 장관인 오빠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바담 씨가 오빠와 대학동창이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순간 내 머리에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듯 시모나 씨를 처음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블레어 씨에게 들었던 내용들이 생각이 났다. 왜 블레어 씨가 그녀를 소개해주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블레어 씨는 이미 모든 일정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으며, 그 중간 역할을 시모나 씨를 통해서 성사를 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블레어 씨가 산업부 장관의 후견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블레어 씨가 세르지우 사장에게 이미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건이 성사되면 현재 사장 자리도 보장해주겠다는 언질을 주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내가 우려했던 일들이 블레어 씨의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산업부 장관이 우리 측에 협력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세영 변호사에게 시모나 씨를 추천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었다.
5월로 들어서면서 따스한 햇살이 내 얼굴에 와닿았다. 나무들이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거리의 사람들은 오히려 두꺼운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2차 협상을 거치면서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이 어느덧 가닥이 잡혀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바담 씨가 아침 일찍 내 사무실로 왔다.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 건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계약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마지막 변수인 미국 경쟁회사의 동향과 정부의 입장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미국 회사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더 이상의 이변은 없을 듯합니다.”
바담 씨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미국 정부로부터 루마니아 정부에 조선소 인수 건으로 공식 채널을 통해 압력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와의 우호관계 때문에 미국 회사가 루마니아에 조선소를 설립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루마니아에 군사 원조를 통해 우크라이나 함대가 위치하고 있는 흑해와 루마니아 국경지역에서 군사정보 수집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정부도 이런 상황을 감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담 씨는 미국에서 흑해에 있는 조선소를 인수한다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미국의 루마니아 군사적 지원에 대해서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흑해에 있는 조선소에 미국 함대가 주둔한다면 우크라이나 함대는 미국의 흑해 봉쇄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미 주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대사가 이건에 대해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였고, 루마니아 정부도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외교관 출신인 바담 씨의 말에 신빙성은 있었지만, 본 계약이 체결될 때 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본사 회장은 루마니아 대통령이 참석한 계약 체결식에서 한국 방문을 제안했고, 조선소 합작회사 설립을 계기로 루마니아 대통령의 한국 국빈방문이 이루어졌다. 망갈리아는 루마니아 속의 또 다른 한국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의 모습과는 달리 거리는 활기차 보였다. 한국에서 불어 온 바람은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거리에는 회사 로고가 박힌 유니폼을 입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름다운 다뉴브 강은 루마니아를 감싸면서 흑해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흑해의 해변 가에는 청춘남녀들의 젊음이 넘쳐나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은 흑해를 달궜다. 바담 씨가 속삭이듯 웃으면서 했던 루마니아 속담이 떠올랐다.
“라서 메르줴!(내버려 둬도 잘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