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 / 에세이
거의 평생을 사대문(四大門) 안에서 살면서 학교, 군대, 직장생활을 남산이 보이는 곳에서 했다. 해외 근무를 제외하면 서울에서 맴돌며 농촌에서는 살아 보지 못했다. 태어나서부터 아파트 생활만 했던 여린 자식을 아버지가 여름 방학이 되면 담임선생님의 시골로 보냈다. 며칠을 화장실도 못 가고, 밤에는 모기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런 고생도 잠시였고, 그 동네 아이들을 사귀면서 개울가에서 물놀이하며 신나게 놀았다. 겨울방학에는 시골 학교 교장이었던 고모부의 사택에서 추운 겨울을 보냈다. 아파트의 난방시설 대신 구들목만 따뜻해 꼼짝 안 하고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그런 어느 날, 사촌 형들이 꽁꽁 얼어붙은 개천으로 데려가 썰매를 태워주던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 집이 서울 근교에 있어 자주 놀러 갔었다. 강남 버스터미널에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이다. 지금은 대도시로 탈바꿈했지만, 시내를 걸어서 다닐 정도로 작은 도시였다. 친구 집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산 아랫마을에 있었다. 세상에서 단절된 조용한 곳이다. 뒷산에 오르면 저 멀리 동해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드러누워 있다. 절에서 들리는 불경(佛經) 소리가 온 산으로 퍼지고, 산 아래 밥 짓는 연기가 마을을 뒤덮는다. 나무 사이로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비추면, 바위에 걸터앉아 눈을 감고 그 따스함을 음미한다. 어둑해지기 시작하면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집으로 달려간다. 옛날에 놀던 그 마을에 새로 조성된 대단지 아파트에서 지금 살고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벌써 4년이 흘렀다. 서울 외곽 농촌 마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아내의 말에 덜컥 분양을 받았다. 공사 현장을 보고 싶어 팸플릿에 나와 있는 주소를 내비에 찍었다. 두 개의 터널을 지나서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가다 저 멀리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오래 살았던 지인이 옛날에는 산을 3개 넘어서 갔었던 오지(奧地)였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농촌이다. 농사짓는 모습을 보면서 사계절이 흐른다. 겨울에 얼어붙는 땅에서 나는 거름 냄새가 진동한다. 농사 준비가 이미 시작된 것이다. 날씨가 풀리면서 땅에서 파릇파릇한 풀냄새가 솟아오른다. 모내기를 위해서 막아 놓았던 수로를 열면서 물이 흐르고, 논에 물 대기를 한다. 농부와 소가 했던 작업은 농기계가 자리를 잡았다. 농부의 손보다는 마음이 필요해졌다.
여름내 뜨거운 햇볕에 견딘 벼들이 수로를 차단하고 물을 빼면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파란색의 벌판이 금빛으로 바뀌면서 농부들의 움직임도 빨라진다. 농기계들이 벼수확과 탈곡까지 동시에 해버리는 과정은 이제 낯설지 않다. 햅쌀은 농협에서 구매해 가고, 일부 필요한 쌀은 창고에 곡식으로 저장된다. 농부들은 텅 빈 논을 보면서 내년을 기약한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산에 둘러싸인 저수지의 물은 깊은 호수의 색깔을 띠고 있다. 그 옆에 있는 캠프장에는 알록달록한 텐트들이 멋을 부리며 패션쇼를 하고 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음식의 냄새들이 저수지로 퍼지면서 산책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더 맛있는 집밥이 차려져 있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옆에는 천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는 많은 새들이 유영하면서 즐긴다. 천을 따라 걷다가 흰 두루미와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커다란 하얀 날개를 펴고 하늘로 비상한다. 새들의 보호 본능이라 생각하지만,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주변의 산에서 고라니가 내려와 겁먹은 눈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창문 너머로 산을 보고 있으면 사계절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그 모습이 궁금해지면 산과 산이 연결된 여러 갈래기를 걸어본다. 군데군데에 있는 나무 의자는 세상과 단절된 공간의 휴식처이다. 새소리를 들으며 모든 생각을 잊어버린다. 맑은 공기가 몸속으로 퍼지면서 무아지경으로 빠져든다. 그 끝의 겨울에는 눈으로 덮인 산의 모습이 할아버지의 하얀 수염처럼 보인다. 그리고 깊은 동면에 빠져든다.
루소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모두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외쳤다. 그는 자연 상태가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상태라고 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 속의 아파트가 싫어졌다. 그곳은 밟아 볼 수 있는 흙이 없다. 이웃 간의 정이 그립다. 경쟁 속에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숨이 막혔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에 지쳤다. 지금 사는 이 농촌 속의 아파트에는 평화로운 자연이 펼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