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인간: 키르케고르·하이데거·레비나스

죽음을 사유하다

by 오르 Ohr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단순히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를 가장 급진적으로 묻는 질문이다.


이 점에서 쇠렌 키르케고르, 마르틴 하이데거,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서로 단절된 사상가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주제를 매개로 하나의 사상사적 흐름을 형성한다.


이 흐름은 내면 → 존재 → 타자로, 다시 말해 영적 위기 → 실존적 각성 → 윤리적 책임으로 이동한다.



키르케고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거울


키르케고르에게서 죽음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절망이라고 말한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거부한 상태, 곧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영적 상태이다. 그래서 키르케고르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고, 그 유한성 안에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도록 요청받는다. 이때 죽음은 파괴가 아니라 회개의 계기, 믿음의 요청이 된다. 죽음은 인간을 무너뜨리기보다,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거울이다..


키르케고르의 결정적 공헌: 죽음을 ‘사유의 중심’으로 끌어옴



하이데거: 죽음은 삶을 진짜로 만드는 한계


죽음은 하이데거에게 삶을 부정하는 사건이 아니라, 삶을 진짜로 만들도록 각성시키는 한계이다.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사유는 20세기에 들어 하이데거에게서 급진적으로 변형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신학적 의미망에서 끌어내어 존재론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존재와 시간』에서 그는 인간(Dasein)을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며, 바로 이 가능성 때문에 인간의 삶은 진지해진다. 만일 인간이 죽지 않는 존재라면, 선택과 결단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파멸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는 한계이며, 인간을 세인(das Man)의 익명성에서 끌어내어 진정성으로 이끄는 계기다.


여기서 죽음은 더 이상 영혼의 문제도, 사후 세계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여기의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강제하는 존재론적 압력이다.



레비나스: 죽음의 사유를 존재론에서 윤리로 이동시키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이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지만,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오히려 나의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사건이다.


그는 죽음을 선택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자기중심성에 빠진다고 비판한다.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무엇보다 타자의 죽음으로 먼저 다가온다.


내가 진정으로 경험하는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하는 타자가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 침묵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다. 이때 죽음은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기원이 된다.


타자의 얼굴은 말없이 외친다. “나를 죽이지 말라.” 죽음 앞에서 인간은 이해하는 주체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주체가 된다.


죽음은 키르케고르에게서 영적 각성의 거울이 되고,

하이데거에게서 실존의 한계가 되며,

레비나스에게서 윤리의 기원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세 사상가의 전개는 단절이 아니라 심화이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영적 상태를 폭로했고, 하이데거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실존 구조를 분석했으며, 레비나스는 죽음을 통해 인간의 윤리적 소명을 드러냈다.


죽음은 더 이상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시험대가 된다. 그리고 이 흐름의 끝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나는 타자의 죽음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레비나스의 개인적 체험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는 추상적 사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과 친지의 죽음, 그리고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역사적·실존적 경험에서 태어났다. 수용소에서 직접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타인의 죽음이 남긴 침묵과 부재를 평생 짊어지고 사유했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내가 언젠가 맞이할 사건”이 아니라, 이미 나를 파괴한 경험이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 사유했다면,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그 관점을 근본적으로 의심한다. 죽음은 내가 소유하거나 결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모든 가능성을 무너뜨리는 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을 흔드는 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사랑하던 타자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이다. 타자가 더 이상 응답하지 않을 때, 인간은 이해하는 주체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존재로 호출된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죽음은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시작이다. 타자의 얼굴은 말없이 명령한다. “너는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책임져야 한다.” 죽음은 인간을 고립된 실존으로 몰아넣지 않고, 오히려 타자를 향한 끝없는 책임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에게서 철학은 더 이상 ‘존재를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타자의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윤리적 응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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