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주현, "단순한 불륜 아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뮤지컬. 세종문화회관 2월 20일~3월 29일

by 오르 Ohr

류광호 작가가 몇 해 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애정하며 강독 모임을 이끌었다. 나 역시 책을 집어 들었으나 방대한 분량 앞에서 끝내 완독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오늘 뉴스에서 옥주현의 말을 보았다. "단순한 불륜이 아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다시 작품 앞으로 불러냈다. 낚였다고 말해도 좋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2월 20일부터 5주간 공연된다. 안나 역은 옥주현, 김소향, 이지혜가 나누어 맡는다.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동일한 인물을 여러 배우가 구현해야만 지속될 수 있다. 안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좌석 가격은 7만 원에서 17만 원까지 다양하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가격표로 환산되지 않는다.


새벽 3시, 서재로 올라가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존재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


이 작품에서 안나는 '누군가의 아내'이기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안나는 카레닌의 아내로, 세료자의 어머니로, 사교계의 품위 있는 부인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정체성은 안나 자신의 언어로 말해진 적이 없다. 사회가 부여한 이름이며 역할일 뿐이다.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까지 안나는 잘 기능하는 인간이었지만, 살아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브론스키와의 만남은 단순한 연애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안나에게 처음으로 "나는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허락한 사건이다. 안나는 사랑을 통해 욕망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 발견은 축복이 아니라 파국의 시작이다. 사회는 여성이 자기 존재의 진실을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나의 비극은 타락이 아니라 각성이다. 그러나 각성한 인간이 머물 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그 각성은 필연적으로 고립으로 변한다.



두 개의 삶


안나는 기차역에서 등장한다. 약속과 규범이 교차하는 공간, 도시의 소음과 군중이 뒤섞인 그곳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안나는 완성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편은 고위 관리이고 아들은 사랑스러우며 사교계에서 그는 흠잡을 데 없다. 그러나 이 완성된 삶은 안나 자신의 언어로 말해진 적이 없다. 그는 잘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 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브론스키와의 만남은 삶의 질서를 깨뜨린다. 안나는 사랑을 선택한다기보다 처음으로 자기 감정의 실재를 경험한다. 그 순간 안나는 거짓 없는 삶을 원하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내 역할을 연기하는 삶, 체면을 위해 감정을 숨기는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다. 안나는 진실을 택한다. 그러나 이 진실은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진실이다.


안나의 삶은 점점 고립으로 기울어진다. 사교계는 그를 배제하고 친구들은 거리를 두며 아들과의 관계마저 제도에 의해 끊어진다. 안나는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는 함께할 세계를 잃은 자유이다. 사랑은 처음에는 해방처럼 느껴지지만 점점 불안과 질투로 변한다.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하지만, 안나만큼 모든 것을 걸지는 않는다. 안나는 인정받고자 하나 그 인정은 점점 줄어든다. 존재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편 레빈은 전혀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간다. 사교적 성공과 허영에 피로를 느낀 그는 땅과 노동 속으로 들어간다. 레빈은 즉각적인 답을 얻지 못한다. 사랑도, 삶의 의미도 쉽게 붙잡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머문다.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실패와 좌절 속에서 그는 자기 삶을 천천히 견뎌낸다.


레빈은 키티와의 관계에서도 성급하지 않다. 거절을 경험하고 좌절을 겪고 다시 기다린다. 그의 삶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자연의 질서 앞에서 겸손해지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 그는 신앙을 발견하지만 그것 역시 확신이 아니라 질문의 형태로 다가온다. 레빈의 삶은 불완전하지만 지속된다.


안나의 삶이 관계의 붕괴 속에서 급격히 무너지는 동안, 레빈의 삶은 관계의 인내 속에서 서서히 자란다. 안나는 사랑이 전부가 되기를 원하지만 레빈은 사랑이 삶의 일부임을 배운다. 안나는 즉각적인 진실을 택하지만 레빈은 느린 성찰의 길을 걷는다. 이 차이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방식의 차이이다.


톨스토이는 안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동시에 레빈을 이상화하지도 않는다. 그는 두 개의 삶을 나란히 놓고 묻는다. 진실을 선택한 삶은 왜 고립되는가. 인내하는 삶은 왜 계속 가능한가. 이 질문은 독자에게 남는다. 작품은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브론스키와 인정의 갈망


브론스키는 단순한 '불륜 상대'가 아니다. 그는 안나에게 처음으로 존재로서 인정받는 경험을 제공한 인물이다. 브론스키는 젊고 매력적인 장교이며 사회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는 안나를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자기 삶의 궤도 안에 있다.


안나는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녀는 "당신은 옳지 않다"라는 사회의 침묵 속에서 살았다. 브론스키는 처음으로 안나에게 "당신의 감정은 진짜다"라고 말해 준 사람이다. 이 인정은 중독적이다. 인간은 인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론스키의 인정은 지속적이지 않다. 그는 사회적 성공, 군 경력, 명예의 질서를 완전히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안나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브론스키는 그렇지 않다. 이 비대칭이 안나를 파괴한다. 안나는 사랑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인정이 점점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무너진다.



자유와 고립


안나의 자유는 추상적 이념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구체적이다. 거짓 없는 관계를 원한다는 자유,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내 역할을 연기하지 않겠다는 자유, 사회적 체면을 위해 감정을 숨기지 않겠다는 자유이다. 안나는 더 이상 이중생활을 견디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단계적으로 비극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선택이다. 그다음에는 배제이다. 그다음에는 고립이다. 마지막에는 자기 파괴이다. 자유를 선택한 안나는 사회로부터 추방되고 친구로부터 멀어지고 아들로부터 분리된다. 자유는 점점 "함께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톨스토이는 자유를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가 관계 없는 상태로 전락할 때 인간이 얼마나 취약해지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안나 카레니나는 불륜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진실을 감당할 언어와 공동체를 갖지 못했을 때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다른 한 인간이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 가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두 삶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톨스토이는 그 거울 앞에 독자를 세운다.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