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전

2023.03.12

by 고주

2023. 3. 12. 일

얼마만 인가?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쏟아지는 비를 몰고 간다.

광주를 떠나오기 전에 만난 지권이, 부산에서 만나야 할 익성이 이야기가 매화꽃처럼 활짝 핀다.

서로의 결혼, 가정, 부모님 이야기들도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섬진강 휴게실

무조건 현지식이다.

바다에 가까워서 그런가, 재첩국이 무지하게 짜다.

총각이라 끓여주는 이 없는 기승이는 빠져 죽을 만큼 많은 미역국이다.

“나이 들수록 성질만 급해진다. 남의 이야기도 좀 들어야 하는데 제 말만 하면 배는 산으로 가지.”

동문회 활동에 발을 들여놓은 준홍이는 근심이 가득하다.

식어도 맛있다는 커피를 홀짝이며 미로처럼 복잡한 부산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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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

두꺼운 패딩을 입고 우산을 쓰고 서 있는 용한이.

비바람이 거세게 분다.

전화로는 바람만 좀 분다고 했는데 우리가 비바람을 또 몰고 온 모양이다.


1983년 입대를 앞두고 전국을 싸돌아다닐 때다.

인천 고모들은 잠 못 자고 콩나물 키워 11대 장손에게 두둑하게 용돈을 호주머니에 찔러주셨다.

강릉 경포대에서 바다를 보고, 부산행 열차를 탔었다.

밤 9시경 택시를 타고 태종대 앞에 내렸다.

썰렁한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고 허름한 여인숙에 몸을 부렸다.

뒤척이며 보낸 밤, 새벽을 가르고 달렸던 바다.

자갈 구르는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뜨거운 청춘이 식고 있었다.


우산을 뒤집는 바람.

멈출 듯하면서 질질 끄는 비.

물안개 속에서 꿈틀거리는 바다를 뒤로하고 코모도호텔 행.

오르락내리락 복잡한 길을 뚫고 간다.

착한 용한이 차는 네비가 길 안내를 하는데 남자 목소리다.

짜도 짜도 허튼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우리 용한이.

건배주로 쓰려던 매실 막걸리를 차에 두고 온 우리 기용이.

여행이 잘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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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림 횟집

자갈치 시장 언저리 자연산 회만 취급한다는 횟집.

핫바지들 말고 자연산과 양식을 구분할 수 있는 고수들만 올 수 있다는 곳.

준홍이 후배가 오늘 어렵게 잡힌 이시가리(줄가자미, 돌가자미)를 특별하게 주문해 두었다.

32만 원 하는 1.6kg짜리.

흑산도 홍어처럼 가운데에 가는 뼈가 있고 살이 오돌오돌하다.

씹히는 찰진 감촉과 갈수록 달달해지는 맛은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세계다.

첫 입맞춤만큼이나 황홀해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현지식 소주는 대선이 톡 쏘는 소주 본연의 맛에 충실하다면, C1은 과일 향이 진하다.

‘좋은 데이’가 순하고 부드러워 건배주로 간택된다.


멋진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전대를 두르고 애리조나 보안관처럼 나타난 익성이.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에서 화순 할머니에게 오게 되었다.

맨날 인상을 쓰고 다녔고, 학교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엄마와 누나를 찾았는데, 너무나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기가 지켜야겠다는 마음먹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반성을 한다.

시장 바닥을 구르며 안 해 본 일이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쓰러지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지금은 여성복을 유통하는 반듯한 사장님이 되었다.

어렵게 연락이 닿아 최근에는 일 년에 서너 번은 꼭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까지는 준홍이에게 들은 이야기다.


효리 남편을 많이 닮았다.

인상을 쓰고 있으면 말 걸기가 어렵겠구나 싶은데, 눈꼬리를 아래로 살짝 내리고 웃으면 깊게 잡힌 주름에서 참기름 느낌이 나는 구수한 인상이 된다.

기억에 남는 스친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스스럼이 없다.

매가 고기를 낚아채듯이 빈 잔에 술을 따르고, 분위기 맞추어 건배를 제의하고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느낀다.

학교 다닐 때 부산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았던 것도, 킥복싱을 배운 것도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단다.

살아오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삶의 공부는 교실에서가 아니라 길바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제 담 밖으로 나온 내게 쏙쏙 박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친구가 되는 것은 오직 친절뿐이다.”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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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치 시장, 깡통시장, 국제시장, 남포동, BIFF 광장까지

가족과 함께 왔었던 몇 년 전의 기억은.

길 가운데로 좌판이 늘어서 있고, 줄 서는 사람들의 꼬리가 보이지 않았고, 타는 음식 냄새와 연기로 꽉 찬 거리를 밀려다녔다는 것.

계절의 차이인 지, 코로나로 바뀐 풍경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차분해졌다.


능숙한 가이드처럼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며 이리저리 시장을 여는 익성이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처럼 졸졸 따라가는 우리.

씨앗호떡은 반듯이 먹여야 한다고.

크기도 하지만 깨알이 톡톡 터지는 맛이 일품인데 세 개는 너무 하잖아.

이미 팬이 되어버린 기용이는 너무 좋단다.


강수연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사회를 보았다는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인도 음식점.

난에 싸 먹는 커리는 알싸하고, 탄두리는 바삭하고 담백하다.

라시는 순한 요구르트고, 맥주는 향이 진하다.

고1 때 학교는 나가지 않았으면서 수학여행은 가겠다고 했다가 혼났던 일.

위험부담을 안고 가야하는 수학여행 대신 결석일 수를 눈감아 주신 임광호 선생님 덕분에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모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적절한 유머와 과하지 않는 농담, 깊이 있는 어휘, 밝은 기운은 바닥을 밟고 일어선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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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프런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마운 준홍이 후배님.

사회에서 만났다는데, 식사와 숙소까지 몽땅 떠안았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만큼 준홍이가 잘한다는 이야기.

에누리 없는 세상,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현실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뿌리내린 사람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

부산의 밤은 황홀했다.

너무 강렬해서 베트남 여행에 누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지만,

첫 테이프를 잘 끊어 일이 술술 풀릴 것이라 주문을 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