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3. 월
창 너머 부산의 아침 하늘은 환한데, 어째 기용이 안색이 좋지 않다.
분명 내가 코를 심하게 골았나 보다.
술까지 거나하게 마셨으니 들으나 마나 천둥이었을 것이다.
아픈 머릿속을 뚫고 나타난 사나이가 있다.
광주 촌놈 네 명이 그 사나이가 슬금슬금 내민 잔 펀치에 완전 녹다운이 된 것이다.
또렷하게 떠오른 생각들을 모아 금고에 담고 자물쇠를 채운다.
바닥을 딛고 올라선 사람은
제 삶의 깊이를 안다
스스로 공부한 사람은
제 그릇의 크기를 안다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잎을 키워
그늘을 만든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다음 해를 준비할 줄 안다
부산이라는 큰 숲에서
아름드리 일가를 이룬
당당한 사나이를 만났다
집을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이다.
집이 나를 못살게 군 것도 아닌데,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싶다.
낯선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여행이 된다.
처음 맛본 음식은 숨겨진 동굴 속을 탐험하는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만드는 추억은 새로운 인연의 끈을 묶는 것이다.
비 온 뒤라 그런지 하늘은 맑지만, 날씨는 쌀쌀하다.
꽉 막힌 부산의 도로를 터덕거리며 빙빙 돌아 찾은 주차장, 발 디딜 틈도 없다.
비행기 뜨는 소리는 시끄러워도 밥벌이는 심심치 않게 되겠다.
도착하는 날 2번 출구에서 전화하란다.
바짝 긴장한 기용이는 전화번호를 입력한다.
짐을 부치고 2층 식당에서 마지막 한식을 먹는다.
평상시에 마누라의 극진한 사랑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는 준홍이와 나는 육개장, 잘하는 것이 없어 눈치를 보거나 볼 사람도 없는 누구들은 전복죽으로 끼니를 때운다.
무슨 모사를 꾸미는지 얼굴을 맞대고 심각한 표정의 31회 사자들.
어슬렁거리며 기웃거리는 사자 선생님.
화장품이나 향수 선물처럼 실속 없는 것이 없다는 마누라.
그럼, 명품 가방이란 말인데, 가랑이 찢어질 일은 애초에 포기다.
파란 눈 젊은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짐에 붙은 전표를 가리킨다.
아마 철자가 다른 모양인데 공항 직원은 매몰차게 서는 줄에서 나가란다.
말이 통하지 않아 더 답답한 듯하다.
좀 친절하게 안내해 주지, 완장 채우니 아주 대장 났다.
딸기 상자를 잔뜩 들고 뒤에 서 있는 베트남 아저씨 어찌할 거나.
생각보다 비행기 자리가 넓다.
베트남 국적기는 대한항공보다 랭킹이 높단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듯이 베트남을 한 수 아래로 보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은연중에 남을 아래로 두는 것이 내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깊게 생각하고, 똑바로 보아야지.
안내방송에 영어는 있어도 한국말은 하나도 없다.
부산에서 출발했으니 한국 사람이 많을 텐데.
이 사람들의 자존심일까, 너희들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는.
옳지 못한 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고, 세상 무서운 것 없이 휘저었고 들이받다 콩밥까지 먹은 우리 기용이.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이 너무 무섭다고 손을 잡아달란다.
사실 나도 고소공포증이 있어 봉알이 간질거리는데 사정 봐주는 척하자.
녀석의 손이 뜨겁다.
육개장이 장에 도착도 안 했는데 밥을 먹으란다.
레드와인 석 잔, 베트남 커피와 함께 싹싹 비운다.
치즈를 발라 먹는 빵이야 어디든 똑같고, 밥 위에 올라간 닭고기 같은데 처음으로 접하는 맛이지만 먹을 만하다.
몇 번의 화장실 가기, 영화 뒤적거리기, 음료수 몇 잔.
그래도 지루하고 더디게 가는 시간.
“엔간히 해라...
짜징 나는 월요일
아침부터 놀러 가는 사진본께 배 아프다.ㅠㅠ”
중훈이는 부러워서 미치는 이 시간, 고맙게 보내야지.
안내방송이 나오는 것을 보니 하노이다.
짐을 찾고 공항 게이트를 나온다.
가이드가 내 이름을 달고 나와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일정을 책임지고 있는 기승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담배를 몇 번 꼬실리고, 후배에게 전화를 하고. 우리는 갑자기 국제 미아가 되었다.
“정영태 선생님 환영합니다.”
대문짝만 하게 써서 들고 있었다는 새끼손톱만 한 여자 가이드가 죽을상을 하고 나타났다.
죄송하다고, 안에서 계속 기다렸다고.
기승이의 울대가 오르락내리락, 후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 여인의 이름은 “투”.
16인승 리무진인 줄 알았다.
6명이 타고 남은 자리에 외롭게 여행하는 여인 4명쯤 태울 수 있겠다고, 송가인이 타고 다니는 차를 기대한 것이 무리였나 보다.
편하게 4명이 여행하기에 딱 맞는 소박한 스타렉스 정도.
젊은 기사 양반 이름은 “통”.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 쪽으로 간다.
강 안쪽의 도시라 해서 하노이, 호수가 무려 30개란다.
한국말도 설은 투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나라 60년대쯤 돼 보이는 오래된 건물 사이를 지나는데, 갑자기 서는 차.
공안과 실랑이를 벌이는 두 명의 기사들.
지갑을 들고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한 참 지난다.
이번에는 따라오라 그러는 모양이다.
졸졸 따라가서 서는 곳은 경찰서 앞.
12인승 이상은 들어가면 안 되는 도로였단다, 결국 벌금 10만 원쯤.
일주일 고생해서 벌어야 할 돈이 날아간 것이다.
오만상 찌푸린 통, 처음부터 자꾸 일이 꼬인다.
민 사장이 지갑에서 한 뭉치 집어 통에게 준다.
나중에 줄 팁을 미리 주는 것이니 기분 좋게 운전하라고.
통의 허연 이빨이 금방 쏟아질 것 같다.
숨이 막힐 것 같다.
온 도로를 점령한 오토바이들.
지렁이를 물고 가는 개미들처럼 차를 에워싸고 달린다.
진도 울돌목 숭어 떼처럼 마주 보고 달려도 부딪치지를 않는다.
내 간이 돌아갈 때까지 남아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