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싫었던 게 아니라, 먹기 싫어지게 된 것이었다
문득, 아주 사소한 무언가가 묵직한 억울함으로 가슴을 짓누를 때가 있다.
나는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다.
먹는다면 주로 귤이나 바나나처럼 껍질을 간단히 벗길 수 있는 것들이다.
사과도 복숭아도 통째로 들고 먹는다.
요즘은 키위조차 껍질째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기에, 씻어서 그냥 먹는다.
반면, 수박, 참외, 멜론, 포도, 딸기 같은 과일은 손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 진심을 감춘 핑계에 가깝다.
과일이 맛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아이에게는 정성껏 챙겨주면서도 정작 나는 다듬어야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잘 먹지 않는다.
나는 세 남매 중 첫째 딸이었다. 막내는 남동생, 나와는 여덟 살 차이가 났고 중간에는 여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 과일은 대부분 '남동생을 위한 것'이었다.
과일을 깎는 일은 대부분 큰 누나인 나의 몫이자 책임이었고, 과일을 먹는 일은 남동생의 권리였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냉장고에 있는 거, 동생이랑 같이 먹어라.”
“동생들 과일 좀 챙겨 줘.”
그 말들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다. 같이 먹으라는 말은, 남동생에게 다듬어 먹이라는 뜻이었다.
나도 과일을 원래부터 싫어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과일을 손질하는 그 순간이, 정말 싫었다.
과일을 입에 넣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 번거로운 과정.
그리고 늘 ‘누군가를 위해’ 깎고 손질해야만 내 입에도 들어올 수 있었던 구조.
점점, 과일을 피하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말했다.
“쟤는 과일을 안 먹는다. 이해가 안 되네. 왜 과일을 싫어할까?”
그 말은 비난 같기도 했고, 실망처럼 들리기도 했고,
어쩌면 낙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 먹은 게 아니었다. 먹기 싫었던 게 아니라, 먹기 싫어지게 된 것이었다.
"과일을 예쁘게 깎아야 자식이 예쁘다더라."
누군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나는 궁금했다.
그 말은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그렇게 예쁘게 깎인 과일은 누구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을까.
그 과일들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 다듬어졌던 걸까.
결혼 후에도 과일을 손질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었다.
“과일 먹을까?”라는 말이 나올 때, 과일을 먹을 거냐고 묻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는, 과일을 다듬고 깎아서 먹기 좋게 다듬어오라는 누군가의 명령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마트나 시장에서 귤, 바나나, 오렌지만 습관처럼 집어 든다.
칼이 필요 없는 과일들. 누군가를 위해 깎지 않아도 되는 과일들.
그런 과일들만이, 아직도 나에게 ‘내 과일’처럼 느껴진다.
과일은, 어쩌면 가장 작고 달콤한 권력의 도착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