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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glecs Sep 10. 2024

말의 힘





 'X야, 너네 은행에 A에게 경비원자리라도 한 번 알아봐줘. 퇴직했다고 마냥 놀 것이 아니라 어디라도 다녀야 할 것 아냐?'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B가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B는 나름 안정적인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친구다. 물론 하청업체이기 때문에 운용하는 것이 쉽지는 않으리라. 여기저기 굽신대야 하는 숙명이니까 말이다. 경비원이나 하청업체 사장이나 굽신대고 친절해야만 하는 것엔 차이가 없다. 급여가 다를 뿐이다. 물론 매우 큰 차이이긴 하다. 


 '야, 거기도 자격증 있어야 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냐.' 대답을 하는 X도 얼굴에는 장난기가 약간은 묻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약간은 당황한 기색도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살짝 A 쪽으로 눈을 돌리고 A의 표정을 살핀 후에 답을 했던 것이다. X의 그런 어색한 낌새를 눈치채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B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대뜸 A는 '은행 경비원도 젊어야 해. 난 나이들어서 쳐주지도 않아.'라고 무심하게 읍조렸다. 


 X는 금융계에서 여전히 현역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명퇴를 하내 마내 하면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늘그막에 투자한 부동산에 된통 물려서 매달 수 백 만원씩 이자를 내느라 허리가 휠지경이기 때문이다. 반면 B는 적어도 경제적 형편 측면에서는 X나 A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가 많은 편이다.   


 X, B, 그리고 A는 모두 대학 동창이다. X와 B는 대학 졸업 후 거의 30년만에 처음 만났다. X 그리고 B와 개별적으로 간간히 연락을 취하던 A가 연결고리가 되서 이렇게 오래 간만에 대학 동창들간의 작은 모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셋 중에서 유일하게 퇴직 상태인 사람은 A뿐이다. 서로 아무런 부담없이 만나서 맥주 한 잔 할 수 있는 사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날 A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약 6시간 동안 같이 있었는데 그동안에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B의 경비원 운운한 한 마디는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라도 어쩐지 모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비원을 하는 친구가 A에게 경비원을 하라고 했으면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B의 말에 악의는 없었다. 단순하게 농담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경비원은 무시받을 직업도 아니다. 엄연한 전문직이다. 


 말 한 마디는 이렇게 무겁고 때로는 가혹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A는 자신이 과거에 타인에게 무심코 내 뱉었던 한 마디에 대해서 이제야 그 책임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A가 사실 말이 좀 많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을 한 대가를 그날 치뤘던 것이 맞을 것이다. 앞으로 더 치루어야 할 것이 적기만을 바랄 뿐이다.  

  

 A도 사회 생활을 할 때는 큰 기업에서 나름 한 자리 하던 사람이다. 물론 그것은 퇴직을 한 이상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부분의 화이트 칼라들은 은퇴 후에 다양한 어려움을 겪는다. 경제적 어려움. 늘 대접받던 위치에 있다가 거의 아무도 신경쓰지도 않고 대우도 해 주지 않는 낯설음. 뭔가 일을 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받아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갖게 되는 소외감. 이 외에도 다양한 문제로 퇴직 이후에 머리가 복잡해지곤 한다. 


 A는 누구 보다도 더 그런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퇴직 이후를 정말로 꼼꼼하게 준비했다. 일단 경제적 어려움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재정적인 측면에서 적어도 곤란을 겪지는 않을 정도로 탄탄하게 준비했다. 맘껏 쓰지는 못할지언정 부족함을 느낄 수는 없을 정도로 재정적 자립을 이루어 놓았다. 회사 생활을 할 때 나름 대접받는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게 퇴직 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느끼고 재임시에 먼저 훌훌 털어 버렸기 때문에 밖에 나와서 그 누구의 대접을 받지 못해도 전혀 타격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현실에서도 전혀 소외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화이트칼라 퇴직자를 억지로라도 받아줄 곳은 연줄이 있는 동종 업체 외에는 거의 없다는 것을 누구 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화이트 칼라 퇴직자들이 갈 곳이 없는 곳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뜩잖아서 선택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 않는가? 보통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은 어디에나 있다. 


 A가 X와 B를 만난지 이미 3일이 지났다. 그 '경비원'이 화젯거리가 된 순간을 잊으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A는 그날의 상황을 이렇게 풀어 놓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것이 결코 쉽게 사라지지도 않고 꺽이지도 않는 말의 힘이다. 과거에 A가 타인에게 했던 말의 힘이 남아서 온 공간을 떠돌다가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자 A에게 다시 되받아치기를 한 것이다. 그 힘이 어느 순간에 다시 A에게로 내려 꽂인 것이고 그들과 만났던 그날 그 시각에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A가 말의 공격에 조금 더 취약해진 시기에 말이다. 그래야 그 '말의 힘'을 더 강력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이렇게 무섭고 강력한 말의 힘을 느낄 때마다 정말 말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입을 닫고 아무말도 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렇게 입을 닫고 살 수 만은 없다. 따라서 남은 선택지는 언제나 말을 하기 전에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도움이 될 만하고 받아들여 질만한 이야기를 선택하는 의식적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정에 휘둘려서 내 멋대로 하고 싶은 말만 한다면 8살짜리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부끄럽지만 A는 최근까지도 어린아이처럼 마구잡이고 하고 싶은 말만 감정에 이끌려서 해왔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A가 너무 겸손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했다.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진 내 마음이다.' 


 A는 그날 일종의 푸대접에 마음이 상했다. 따라서 이것은 A가 그동안 대접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A는 나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내가 왜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가 된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이렇게 평소에 겸손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호도 백범(白凡)이다. 白凡은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던 것은 맞을지 모르지만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끝없이 겸손했기 때문에 이런 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닐까? 


 내게 오늘 하루는 말의 힘과 무게 그리고 겸손함을 다시 생각하는 날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것들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준 B에게도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그날 B도 사실 약간은 겸손하지 못했지만 크게 나중에 대가를 치룰 정도로 오만하지는 않았다. 사실 B는 '사실'을 말할 것 뿐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무튼 B가 나처럼 대가를 치루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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