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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찾는 길

불만으로 가득하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자

by Eaglecs



들어가는 글



당신은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의도하는 삶을 당신의 의지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과거의 어느 날에 기록한 나의 일상 속에서 내가 나를 얼마나 철저하게 잃고 삶을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를 잃어 버린 삶을 꽤 오랜 기간 살아 온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우리를 잃어 버린 삶을 산다. 그런데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나의 복잡한 사고의 흐름을 의미 전달의 한계가 명확한 갖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하려고 애썼다. 쉽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의 흐름과 여러분들의 삶의 흐름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가능한 많은 분들이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살아 냈기를 희망한다.




본문



나는 꽤 오래전부터 현실이 헷갈렸다. 지금 이메일을 보면서 동시에 이 글을 타이핑하고 있는 이 순간이 현실 같기도 하고, '간밤'이라고 생각한 그 시간 동안 꿈속에서 겪은 모습들이 진짜 내 현실인 듯한 생각도 든다. 지금 느끼는 이 순간의 감각보다도 더 생생한 느낌을 자주 '간밤'에 느끼곤 하는데, 그럴 때면 지금의 현실로 복귀하여 내가 진짜 현실로 온 것인지 아니면 진짜 현실을 벗어나서 꿈속에 빠진 것인지 헷갈린다. 호접몽이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


현실이 무엇인지, 즉, 지금 눈뜨고 있는 이 순간의 현실성을 의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 겪는 이 순간에 대한 불만이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나의 현실에 대하여 ‘이게 사실일 리가 없다'는 유아기적 반항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순간이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난 잠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실제로 잠드는 것이 제일 쉬울 정도로 순식간에 잠에 들어간다. 저녁 10시가 넘어가면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졸음이 오지 않아도 이제 곧 새로운 현실로 들어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수많은 현실 중에서 오늘은 과연 어떤 또 다른 현실을 겪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어제도 그랬다. 어제 밤에 겪은 현실은 지금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 현실이 또 기억속에서 되살아 날 것이다. 늘 그래왔으니까.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이 공간이 부자연스럽고 불만족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의 박탈, 정확히 묘사할 수 없는 불안감, 조직내 지금의 위치에서 더 나아갈 가능성이 계속 줄어간다는 생각, 뭔지 모르지만 그냥 붕 떠있는 듯한 공허함. 간절하지는 않지만 그냥 약간 애가 닳듯이 뭔가 비어있고 뭔가 부족하고 뭔가 불분명한 느낌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서 일 것이다. 딱 한순간, 내가 다시 '또 다른 현실의 최면'에 빠져들기 전에는 말이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현실은 일종의 최면에 빠질 때에야 비로서 몰입할 수 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휴대폰을 열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날씨 이외에는 거의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네이버 뉴스를 살펴보고, 재미있거나 특이한 사진이 나온 기사를 훑어 본다. 그렇게 10여분간 눈을 뜨자마자 일종의 ‘최면’에 빠진다. 그때는 뭔지 모르는 몽롱한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불만스럽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그리고나서 취한듯 일어나 옷장에서 그날 신을 양말 한 켤레를 꺼내서 거실로 나간다. 계속 몽롱한 상태에서 세면을 하고 면도를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하기 위하여 헤어크림을 바르고 살짝 빗어 넘긴다. 다음은 내 셔츠가 보관된 작은 방으로 가서 어떤 셔츠를 입을지, 정확히 말하면 어떤 셔츠가 다려져 있는 것인지, 어떤 셔츠가 한 번 입었지만 다시 한번 더 입어도 되는지 짧은 스캔을 거친 후 하나를 골라서 거실로 나온다. 양말을 신고 바지를 입고 셔츠를 입고 바지 색깔에 맞는 허리띠를 꺼내서 두른다. 가방 속에 책, 노트북, 마우스 등 필요한 물품을 넣고 아무렇게나 닫는다. 그리곤 발걸음을 부엌 쪽으로 옮겨서 부엌 바닥에 놓인 충전기에 거치된 갤럭시 워치를 들어 올려서 왼 손목에 걸친다. 그리고 이내 거실을 한 바퀴 둘러 본다. 아마도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아닐 것이다. 어떤 루틴에 사로잡혀서 그대로 작동하는 기계일 뿐.


이젠 마스크를 쓰고, 자동차 키는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안경 닦기는 왼쪽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은 오른쪽 바지 뒷주머니에 끼워 넣고 가방을 든다. 거실 불을 끄고 곧 휴대폰 화면을 불빛삼아서 거실 복도를 비추면서 현관으로 이동한다. 조용히 전실 문을 열고 신발을 신고,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간다. 그 다음의 모든 동작들도 역시 프로그램 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모든 Process를 거쳐 회사에 도착하여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에 자리한다. 그리고 그날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회사에 들어온 이상 자동으로 추가 마취제가 사무실 대기를 통하여 체내로 주입된다. 이곳에서 뭘 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메일을 체크하고 답신을 하고 부하 직원들에게 지시를 한다. 노트북 화면에 새로운 메일이 답지하는 것이 멈추면 내 뇌도 멈춘다. 그럼에도 그냥 하염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괜히 이미 본 메일을 열어 보기도 하고, 불필요한 메일을 지우기도 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아니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마취된 채 책상을 지키고 있다.


방금 또 메일이 들어왔다. 모니터 우측 하단에 Pop up 창이 뜨면서 새로운 메일이 왔다는 신호가 보인 것이다. 0.1초 만에 해당 메일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이 불필요한 것임을 인지한 나는 다시 책상을 지킨다. 이렇게 오전이 가고 점심을 먹고 또 오후가 간다. 그리고 5시 30분이 되면 가방을 챙겨서 사무실을 나온다. 물론 내 방을 홀로 밝히는 형광등은 끄고 나온다. 그렇게 내가 하루종일 자리하고 있던 내 사무실에서 난 또 다른 행선지로 이동을 한다. 프로그램된 대로 이동한다.


이젠 역순이다. 회사의 거대한 건물을 빠져 나가서 내 차를 타고 약 45분을 주행하여 청라 아파트 지하 2층에 도착하여 주차선에 정확히 그러나 바로 옆에 주차할 알지 못하는 사람의 주차 편의를 위하여 가급적 벽이나 기둥 쪽으로 내 차를 밀착시켜서 주차한다. 엘레베이터로 이동하여 잠시 대기 후 탑승. 집에 도착. 기계적으로 입었던 옷을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고, 가방에서 책과 노트북을 꺼내 책상에 올려 놓고, 데스크탑 PC를 켜고, 동시에 음악을 듣기 위하여 앰프와 스피커를 켜고, 연결된 갤럭시 탭을 활성화시켜서 음악을 울리게 한다.

세면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 다시 이젠 집 거실에 있는 내 책상에 앉는다. 아직도 난 최면이 풀리지 않은 것 같다. 거기서 3시간 정도 최면 상태에서 책도 보고, 인터넷에서 유튜브도 보고, 역시 아무짝에 쓸모없는 네이버 뉴스를 또 본다. 나랑 아무런 상관도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로 가득찬 포털 서비스를 종횡무진 헤치고 다닌다. 그렇게 10시가 되면, 난 새로운 현실을 찾아가기 위하여 책상을 간단히 정리하고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1분. 딱 1분이면 된다. 새로운 세계로 빠져드는 데는 말이다.


나는 완전히 뇌가 획일적으로 가동되도록 프로그램되고 거기에 어떤 특정 패턴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어가 내 뇌 속에 각인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거의 이러한 패턴으로 20년 이상을 살 수가 있겠는가?


세상에 태어날 때 나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그럴 것이다. 기억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나를 배워 갔는데, 그게 좀 잘못된 것 같다. 여전히 난 나를 모르고, 내 삶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냥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좋게 표현하면 현실에의 완벽한 적응을 위하여 매우 열심히 계획적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그게 바로 안주하는 것이고 수동적인 것이고 개성이 없는 몰개성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식으로 작동되는 지금의 내 현실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냥 가능태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내 현실중의 하나가 지금 내가 자각하는 현실일 뿐인 것이다. 이 현실은 내가 온전히 육을 벗어날 때에야 동시에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은 많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측면에서 지금의 내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지극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현실을 너무 애매하고 복잡한 것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왜 난 내가 내 현실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다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역설적으로 내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슬픈 '인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현실을 수용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도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고 늘 꿈속에서 산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욕망 속에서 우리는 삶을 채워가고 동시에 늘 갈증을 느낀다. 그 갈증은 끝이 없다. 내가 느끼는 부족함, 뭔가 애매함, 불분명함, 희미한 느낌 등은 바로 내가 늘 갈증을 느끼고 있음의 반증이다. 없는 현실 속에서 현실감을 찾기가 사실 쉽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래도 본질을 볼 수 있는 노력은 더 해야 할 것 같다.


어렵더라도 지금의 현실을 주목하자. 직접 매섭게 노려보면서 내가 처한 이 순간의 현실을 평가해 보고 앞으로 내가 겪게 될 미래의 현실을 예상해 보자. 이게 자각이다. 물론 그대로는 되지 않겠지만, 좀 더 객관화된 내 현실을 자각하고 지각하면 내가 왠지 모를 애매함 속에 빠지는 빈도수는 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나가는 글



나는 나의 삶의 길을 아직도 찾았나? 사실 한편으로는 내 생각에 나의 삶의 길은 바로 내가 그것을 찾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기는 지금 당장 내가 걷고 있는 길이라고도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삶의 길을 이미 걷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더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의 이해가 맞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이미 나도 모르게 찾아서 걷고 있는 중인 나의 삶의 길을 더 인식하면서 걷는 것뿐이다. 지금 처해있는 나의 현실에 대한 부정이 그 현실을 탈바꿈시킬 수는 없다. 그 현실 속에 있음을 자각하면서 그리고 계속 하루 하루 자각을 지속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도전할 때 나의 삶의 길이 좀 더 흥미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


늘 자신의 삶이 이해되지 않고 '이게 뭔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면 이젠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보고 겪고 있는 그 순간이 바로 당신의 진정한 삶이라고. 따라서 당신은 당신의 그 삶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추출해 내야 할 것이다. 물론 어려운 또 다른 삶의 길이 될 것이다.

삶의 길.jpeg

(출처 :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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