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

내 삶의 필수요소

by 허은숙


겨울비가 내린다. 빗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의 고요함, 미명의 세계, 모두가 잠에서 깨지 않은 새벽에 빛나는 하루의 삶을 예비한다.

한밤중에 잠이 깨어 글감을 생각했다. 다시 수면으로 빠져들 때까지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손꼽아 보자. 무엇을 위해 사는지, 가족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누구를 위한 삶이 아니다.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이 얼마나 있었던가!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새로운 날을 그려본다. 하루를 대하는 태도 전환의 시간이다. 지금부터는 무엇을 더 이루기보다 무엇을 깊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우선순위는 건강이다. 오전에 주로 걷기를 한다. 삶의 바탕이 된다. 나의 행보에 남편의 건강, 가족의 건강은 필수다. 남편과 함께 주변을 산책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된다. 어느 날은 부산 전통시장에서, 대구의 낯선 길을, 경북 청도의 산길을 걷는다. 가장 먼저 챙기지 않으면 무너지는 것이다. 건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아직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만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 숨을 고르고, 어디쯤 와 있는지 묻는 일,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피곤하면 쉬고, 힘들면 힘든 것을 허락하는 일이다. 오감을 열어 놓고 함께 걷는 시간을 최고의 시간으로 만든다.

두 번째, 나를 나답게 만드는 시간을 가진다. 이제, 이 나이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젊을 때도, 더 나중도 아닌 지금의 감각과 속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오감으로 느끼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읽어 낸다. 지금의 시선으로 느끼고 붓으로 그리고 쓰는 글이다. 문인화가가 되기 위해서 계속 써야 한다. 잘 그리고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직해지기 위해서다. 우울할 때나, 고독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무의미한 하루라는 생각이 들 때 나를 들여다보는 창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역할이 아닌, 나의 시간이다.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을 즐긴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줄어들면 삶이 공허해진다.

세 번째는 대인관계다. 송년회를 한다고 어제는 하루 종일 나돌았다. 동호인, 동아리 회원 중 함께하기에 힘든 사람도 있고, 즐거운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나를 편안하게 대하는 사람이 좋다. 관계를 형성해서 자신에게 이용하려 드는 사람은 티가 난다. 진심이 아닌 사람이다.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와 상황에서 한 발 물러나자. 관계의 질을 향상하는 일이다. 부담 없이 편안함을 주는 사람,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순간을 더 소중히 품기로 한다. 많은 관계보다 안부를 묻지 않아도 연결된 몇 사람. 굳이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관계형성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사와 비교를 내려놓고 나만의 흔적을 만든다. 늦지 않은 시간이다.
누군가의 속도, 누군가의 성취를 내 삶의 잣대로 삼지 않는다. 이미 나만의 계절을 지나고 있다. 잘 해낸 날보다 버터 낸 날을 더 귀하게 여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에도 '그래도 괜찮다'라고 다독거리면서 나에게 친절해지려 한다.

대단한 삶이 아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시간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위로될 글을 쓴다. '나는 이렇게 살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태도를 지속시키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아니라, 더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나에게 머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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