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km를 걸으며 든 생각
지난 주 금요일. 퇴근하고 집에 와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누워있는데 유독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띵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재밌는 유튜브를 봐도,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가슴 속의 공허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나도 모르게 자존감이 바닥으로 내리꽂는 시기가 있는데, 아무래도 그 시기가 찾아온듯 했다.
울적한 마음으로 밤새 뒤척이다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불쾌한 감정에서 벗어나려면 뭔가 극단적인 처방이 있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일 주말 이틀동안 머릿 속 복잡한 생각들이 싹 달아날 짜릿한 경험을 하려면 뭘 해야할까. 그러던 도중 몇 주 전부터 하고 싶었던 하나의 챌린지가 생각났다. 바로 '서울 2호선 한 바퀴 걷기'.
유튜브에 '2호선 한 바퀴 걷기'를 검색하면 여러 유튜버들이 도전한 영상들이 나온다. 나도 유튜브에서 이것저것 돌려보다가 우연히 보게된 챌린지인데, 내가 원체 서울이란 도시를 좋아하기도 하고(안타깝게도 나는 인천 출신이지만), 최근 부동산 공부를 한다고 서울 전역을 뻔질나게 돌아다녔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언제나 실행하고 싶은 챌린지였다. 그러던 도중 마침 예상치 못한 우울이 찾아왔고, 그걸 기회로 삼아 33도가 넘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도전하게 됐다.
출발은 집에서 가장 가까운 2호선 역인 홍대입구역에서부터 시작했다. 기온이 33도를 훌쩍 넘어가는 푹푹 찌는 날씨에 시작할 때부터 '이거 불가능하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홍대까지 지하철을 타고 온 김에 일단 하는데까지 해보자는 생각으로 다음역인 합정역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합정을 지나 양화대교를 건너 당산으로 진입했다. 당산역 KFC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힘을 내 영등포구청, 문래, 신도림을 지나 대림으로 접어들었다. 홍대입구에서 시작해 대림쯤 가니 온몸이 땀에 절고 숨이 턱턱 막혀왔다. 출발한 지 3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도저히 이 땡볕에선 더이상 걸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구로디지털단지역, 신대방역을 지나 신림역에 다다랐을 때, 근처 카페에 들러 잠시 쉬어가는 타임을 가졌다. 2천 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1인용 좌석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쉬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잠깐 잠이 들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약 1시간정도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고 나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인 6시정도부터 다시 2호선 걷기 여정을 시작했다. 해가 지고 기온이 내려가서 그런지 한낮에 걸을 때에 비해 훨씬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신림에서 출발해 금세 봉천, 서울대입구, 낙성대, 사당, 서초, 교대를 지나 강남역에 다다랐다. 신림에서 출발하고 약 3시간정도를 쉬지 않고 걸었지만 낮과는 다르게 힘들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강남역 맥도날드에 들어가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나서 다시 동쪽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다. 홍대입구역에서 출발한 지 약 8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어서 역삼, 선릉, 삼성, 종합운동장, 잠실새내역을 지나 드디어 잠실역에 다다랐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신림역에서 짧게나마 낮잠을 자서 그런지 발바닥은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늦은 시간에도 딱히 졸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3분의 1만 더 가면 도전에 성공한다는 생각에 없던 힘이 솟아나기도 했다. 그렇게 잠실나루역을 지나 강변역을 향해 잠실철교를 건너갔다. 잠실철교를 건너며 바라본 서울의 야경은 그 어떤 풍경보다도 황홀하게 느껴졌다.
강변역에 도착하니 거의 다왔다는 생각과 동시에(아직 20km를 더 걸어야했지만...) 잠실철교의 아름다운 풍경 탓에 느끼지 못했던 졸음이 확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발바닥도 불에 타는듯 너무 아팠기에 강변역과 구의역 사이의 24시간 카페에 들러 휴대폰 충전도 하도 내 몸도 충전하며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어 있었고, 출발한 지 12시간이 다 돼가고 있었다.
그 이후는 고백하건대 사실 고통의 연속이었다. 건대입구역을 지나 성수, 뚝섬, 한양대, 왕십리까지 지상철을 따라 걷는 지리한 여정이 계속 되었다. 중간중간 굉음을 울리며 새벽의 빈 차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겨우 왕십리역을 지나 상왕십리, 신당, 동대문역사공원, 을지로4가, 을지로3가, 을지로 입구역에 접어들었고, 새벽 5시가 다되어 지치기도 하고 배도 너무 고파 근처 24시간 순댓국집에 들러 만 원짜리 순댓국을 사먹었다. 그 늦은 시간에도 술 마시는 손님들로 순댓국집 안에 꽉 차있던 게 꽤 인상적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을지로입구역을 지나 시청역을 향해 걸었다. 시청, 충정로를 지나 아현역에 다다르니 이제 정말 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풍도 당당한 마래푸를 보며 아현역을 지나 이대역을 걸어갈 때쯤 어느새 날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두 정거장인 이대, 신촌을 지나 전날 오후 1시에 출발했던 출발지인 홍대입구역에 다음날 오전 7시가 되어서야 마침내 도착할 수 있었다.
온몸은 땀에 푹 절어있었고, 발바닥은 마치 마비된듯 더이상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삼성헬스를 켜보니 이틀동안 총 61킬로를 걸었다. 걸음수는 7만9천이었다.
날을 새면서까지 평소엔 걸을 수 없는 엄청나게 긴 거리를 걷고 나니, 금요일부터 나를 힘들게 했던 우울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단지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구나. 또 사무실에 갇혀 있을 시간에 이런 아무 의미 없는 일만 하면서 하루를 보내더라도 어쩌면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 삶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형언할 순 없지만 앞으로의 삶을 힘차게 살아나갈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었지만 그만큼 예상보다 훨씬 더 큰 즐거움을 준 도전이었다. 삶이 너무도 답답할 때 가끔씩 하는 이런 일탈(?)은 분명 삶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조만간 가을이 찾아와 날씨가 더 시원해지면 다른 지하철 노선 완주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 다음 도전은 아마 서울지하철 3호선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