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일기
커피와 함께 하는 아침은 마음이 여유롭다. 더욱이 출근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집에 있을 수 있는 아침의 여유로움에 커피의 여유로움까지 더해지면 인생은 순간 장밋빛이다. 모두가 나가고 없는 집에서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좋아도 너무 좋다. 아니 이런 시간을 사랑하기까지 한다. 나 혼자만의 시간..
커피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며 오늘의 약속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11시에 미용실 머리 염색하기, 12시30분 J 언니와 점심을 먹고 J 언니가 새로 입주한 아파트 집 구경가기, 사정상 오랫동안 미루어온 일이었기에 오늘 이 두가지 일을 끝내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이다.
이러한 상념속에 커피를 마시고 있는 순간 전화 벨 소리. 아버지다. ' K, 바쁘냐?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 오늘 부동산에서 집보러 온다고 하는데 엄마가 집 안판다고 하고 집도 안보여준다고 하네, 니가 집에 좀 가봐라' ' 몇시 온다는데요?' '11시에 온단다' ' 약속 있는데,..아버지는 어디세요?' ' 김해에 있다. 어제 엄마가 김해와서 우리 밭에 다른 사람이 집을 지었다며 왜 의논도 없이 밭을 팔았냐고 난리여서 집에서 얘기하다 도저히 안되서 다시 김해에 와버렸다. 여기서 잤다' 힘이 없는 목소리였다. 아버지 엄마가 우리 공부 시키느라 한창 어려울때 몇십년 전에 팔았던 밭 얘기다. 그렇다. 엄마는 치매일지도 모르는, 그렇다고 치매진단은 나오지 않는 애매한 상태의 기억으로 우리를 오락가락하게 한다. 3년째 6개월마다 치매검사를 받고 있으나 치매는 아니란다. B병원에서도, 치매안심센터에서도 다 아니란다. '경도 인지장애' 라는 명칭이 적절한 병명인듯하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친정엄마 댁에 도착했다. 집에는 손님이 와 계셨고 차를 마시며 얘기중이었다. 엄마는 부동산에서 집보러 온다며 나름 청소도 하고 계셨다. 휴~우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손님은 딸인 내가 불편한지 부리나케 다음에 오겠다며 짐을 챙겨 나가셨다. 곧이어 딩동 딩동~부동산이다. 집보러 온 손님은 젋은 신혼부부인 듯 보였고, 집을 둘러보는 동안 얼굴 빛은 웃는 얼굴이었으나 그 웃음 뒤에는 전혀 사고 싶은 마음이 없는 속내가 내 눈엔 바로 보였다. 아니 내가 신혼부부라면 절대로 이 낡은 집을 사고 싶지 않기에 내 마음을 신혼부부에게 투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순간 미용실 예약을 취소하고 온 나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었고 또 이런 부부싸움에 나의 일상이 건드려 지는 것이 속상하면서도 또 아버지의 고통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엄마는 나를 앉혀 놓고 말했다. '너거 아버지가 내가 겨우겨우 동네 배씨랑 바꿔놓은 밭을 말도 없이 팔아뿟다. 의논도 없이 밭을 팔고 그 돈을 다 어디에 썼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랑 더 이상 못살겠고 이혼할거다' '엄마 그 밭은 우리도 다 판거 알고 있는데 엄마만 모른다고 하노, 우리 공부시킨다고 그 밭 팔았잖아. 기억 안나나? 지금 몇년도인지 말해봐' '가시나야 니가 뭘 안다고 그러노 그럴거면 집에 가라!'
작년 여름의 어느 토요일, 9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지하주차장에 막 주차를 했을때 아버지의 전화 한통. 김해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였고 엄마가 중간에 내리겠다고 고함을 지르고 아버지도 화가 나서 내리라고 하고 아버지는 다시 김해로 돌아가버렸단다. 아버지는 엄마의 치매 아닌 치매증상으로 걱정이 되셨는지 엄마를 찾아 집에 모셔드리라고 한다. 여름이라 낮이 길었지만 금방 어둑어둑해지는 밤에 엄마에게 전화하니 대저에서 부산쪽으로 걸어오고 있다고 데리러 올 필요 없다고 나에게까지 화를 내었다. '엄마 움직이지 말고 주변에 뭐가 보이는지 말해보세요' '당리마을' '그럼 제가 찾아갈테니 거기 그냥 서 계세요, 저 출발할께요' 컴컴한 밤 엄마가 어떻게 될까봐 걱정이 되어 혼자 울면서 차를 몰고 겨우겨우 당리마을 표지판을 찾아갔다. 엄마는 없었고 다시 전화를 했다. '엄마 당리마을 표지판 앞인데..없네..어디예요? ' '00 추어탕 이라고 적혀있네...앞으로 좀 더 걸어왔다' '엄마 거기 딱 서 계세요. 움직이지 말고 움직이면 내가 엄마 찾기가 너무 힘들어져' '응..' 어두컴컴한 도로변에 엄마가 가방을 들고 서 있는 모습..얼른 눈물을 훔쳤다.
엄마의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기억과 고집은 나의 온정을 멀리 달아나게 한다. 상처받고 신발을 신는다. 미용실 염색은 하지 못했지만 J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러 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언니를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엄마' 라고 뜬다. '응 엄마' '니 점심 먹었나? 김밥 한줄 사와서 같이 먹자' ' 난 약속이 있는데, 집에 밥 없어요?..좀 있다 김밥 사갈께..기다려' 엄마는 방금 화내고 방금 밥 먹자고 전화를 한다. 이미 익숙한 일이다. 화를 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엄마는 이어서 말을 한다. '너거 아버지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마라, 아버지 L 한테 날마다 가고 그 여자한테 돈 갖다준다.' 'L???, 엄마 무슨 말 하는데? L이 어디 사는데?' 'L 우리 옆동에 산다' '엄마 무슨 소리하는데?'
가슴이 철퍼덕 내려앉는다. 초등학교 6학년때쯤이었다. 옷장 서랍장 깊숙이 발견한 엄마의 일기장, 호기심에 한장 한 장 읽어보았다. 아버지가 동네 여자 L을 좋아하고 그 여자에게 반지를 사준 사실, 그 여자를 만난 사실등 속상한 마음을 늘어놓았다. 그 일기장의 내용은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나의 비밀이 되었고 그 내용이 어디까지 진전이 되었는지 한번씩 일기장을 훔쳐 보았지만 그 이후의 내용은 적혀 지지 않아 나에겐 끝난 일이 되었다.
엄마의 기억이 그때로 돌아가 있는 듯하다. 그때 엄마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슬프지는 않았다. 그 일기장의 내용은 그냥 소설처럼 읽혀지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정도였다. 그런데 내가 30년 넘게 지켜 왔던, 아니 잊어버리고 있었던 비밀이 일기장의 주인공 입을 통해 이런식으로 발설되는 순간,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반지를 사줬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엄마가 어떤 심정으로 그 일기장을 써내려갔을지를,...지금 결혼해서 세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나는 이제 충분히 안다. 그때의 엄마의 심정을,...아니 충분히 안다기 보다는 가늠할 수 있다. 나의 비밀은 내 인생 전반에 걸쳐 문득문득 떠올랐고 그럴때마다 들키고 싶지 않는 듯 감추기에 급급했다.
아버지가 말한 의미를 이제 알듯도 하다. '젊은 시절에 엄마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좋은 말만하고 살아라' '이제 살만하니 엄마가 병이 들어서..내가 십자가를 지고 어떻게든 엄마를 책임지려고 하는데...나의 모습이 저모습이 아닐까,...두렵고 슬프다' 우리가 없는 곳에서 엄마는 아버지와 계속 그 곳의 기억을 가지고 와서 부부싸움을 해 온 듯 하다. 아버지가 우리 자녀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아마도 많이 부끄러워 할 듯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다정했던 모녀 사이가 단번에 어색한 관계로 변해 버릴 수도 있을것 같다. 그래서...그래서..그 일은 비밀로 덮어두려고 한다.
며칠 후 엄마의 기억력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엄마는 착하게 착하게 아버지와 사이 좋은 엄마로 돌아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