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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May 23. 2024

제발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너의 이름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자, 출석 부릅니다. 강○○, 국□□......"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기 전, 김춘수 시인의 시 ''의 한 구절을 비장하게 읊고 나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 부르기는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수업 시간 내내 집요할 정도로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대며 아이들을 괴롭힌다.


"종호야. 그만 좀 자라."

"대진아, 오늘 급식 메뉴 뭐냐?"

"숙영이는 국어 성적 많이 올랐더라."

"자, 유연이가 다음 문단부터 읽어 보세요. 목소리 좋네. 아나운서가 꿈이야?"

출처 : 픽사베이

 나에게 이름이란 각별한 기억이자 특별한 의미이다. 교생 실습을 나갔을 적의 일이다. 교생답게 모둠별 협동학습 모형으로 수업지도안짰고 수업 실연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어리숙한 교생의 첫 수업 실연은 내 교직 인생 전체의 색채와 질감을 결정하는 터닝포인트였다.


"자, 이제부터 모둠별 발표를 해보겠습니다. 1모둠에선 어디 보자, 숙자 학생이 발표해 보세요."


 숙자(가명)의 발표가 끝난 후 2모둠에선 영희(가명)라는 학생을 지목하여 발표를 시켰다. 영희는 수줍게 일어서더니 모둠 결과물을 차분한 어조로 조곤조곤 발표했다. 잘했다는 피드백을 짤막하게 남기니 영희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모둠별로 발표 활동을 마무리하고 첫 수업 실연을 무사히 마쳤다. 


 홀가분한 기분을 기분 좋게 싸매고 교실을 나섰다. 아까 발표를 시켰던 영희라는 학생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더니 수줍은 기색을 얼굴에 머금고 날 조용히 불러 세웠다. 여고생이 남자 교생 선생님을 좋아하는 일이 간혹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혹시 나에게 부끄러운 고백이라도 하려나 같은 학원로맨스물의 한 장면을 살짝 기대했다. 하지영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날의 장르를 학원로맨스물이 아닌, 한 편의 애절한 '인간극장'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버렸다. 


"교생 선생님, 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제 이름 불러준 거 오늘이 처음이었어요. 감사합니다."


 거짓말 같은 현실을 맞닥뜨렸다. 차라리 장난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영희의 진심 어린 눈빛과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모든 것이 진실임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었다. 고작 이름을 불러준 게 감사받을 일인가? 영희는 내 가슴속에 하나의 싹을 더 틔우고 교실로 돌아갔다.


"잘했다는 칭찬도 처음 받아봤어요. 고맙습니다."


 대략 11년의 세월 동안 영희는 수업 시간에 영희였던 적이, 혹은 발표 잘하는 영희였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학생 1이거나 학생 A였겠지. 백 번 양보해서 영희가 선생님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임을 전제해도 이건 정말 학생 영희에겐 가혹한 현실이 아니었을까. 영희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는 하나의 신념내 머릿속 깊은 곳에 단단히 심어두었다.


'아이들의 소중한 이름을 최대한 많이 불러주자. 그리고 칭찬해 주자."


 예전에 즐겨 봤던 드라마 '하얀 거탑' 속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야망으로 똘똘 뭉친, 의료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외과 과장 장준혁은 내연 관계에 있는 희재라는 여성의 바(Bar)에 방문한다. 둘은 지척에서 마주하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준혁 : 희재야.

희재 : (흐뭇하게 그저 준혁을 응시한다.)

준혁 : (희재의 시선을 느끼고) 왜?

희재 : 이름 불러줘서. 자기 내 이름 잘 안 부르잖아.

준혁 : (기억을 상기하며) 그랬나?

희재 : 이름을 불러준다는 거 흔한 일 같지만 잘 안 그런다? 자기도 잘 생각해 봐. 누가 준혁아, 해 주는지. 그 사람이 바로 자길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일 거야. 왜냐면 타이틀이 생기면 그 타이틀이 내가 되잖아. 무슨 무슨 사장님, 무슨 회장님, 장준혁 과장님. 물론 자긴 그 타이틀 때문에 이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지만 말이야.

준혁 : (말없이 회상에 잠기며 자신을 준혁아,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어머니와 최근 갈등 관계에 있는 친구 도영을 떠올린다. 자신의 타이틀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어머니와 도영이란 친구밖에 없다.)

                                                                                                   

 -드라마 '하얀 거탑' 속 대화 인용


 오래전 드라마이지만 아직까지 이 장면이 선명하게 뇌리에 찍혀 있다.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고 당시 이 장면을 보고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봤었다. 내게 붙은 타이틀이 아닌, 날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 내 이름을 온전히 불러주는 사람이 과연 내 주변에 얼마나 있을까.


 학교 생활을 하며 가끔 연배가 높으신 선생님들은 종종 날 향해 '어이!'라고 부르곤 했다. '어이'란 사람은 여기 없다고, 굳이 '어의'찾고 싶다면 허준한테 가 보라고 꼬집고 싶었지만, 어르신들이 쓰시는 관습적인 표현 중의 하나겠지,라고 치부하며 예의 바르게 응대해 줬던 기억이 난다.


 이름이란 건 곧 그 존재의 본질이다. 이름 모를 꽃에도 이름을 붙여줘야 꽃이란 존재로 피어나듯이, 사람에게도 이름이란 것이 존재를 완성시켜 준다. 비록 동명이인이 많을지라도, 외형적으로 닮은 사람이 수두룩해 80억 인구 중에 나란 존재는 오직 나 '하나'뿐이다. 그만큼 인류 중에서도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이다.


 존재의 방점은 결국 이름이다. 사람들이 링컨의 업적까진 자세히 모를지라도 링컨이라는 이름은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여 영원히 남아있다. 이름은 곧 그 사람의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소중한 이름을 또박또박 불러 드리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세요. 그대에게 꽃이 되고 싶어요. 호랑이 가죽이 아닌, 제 이름을 그대 가슴속에 남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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