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하는 아이, 소멸하는 부모
축복 가득한 아이의 탄생은 부모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써 나갈 사랑의 대 서사시, 그 첫 시작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그건 승리만이 존재하는 잔혹한 '생존 게임'의 출발선에 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꿈꾸는데 현실은 냉혹하게도 생존을 위한 전사(戰士)로 키울 것을 요구한다. 냉정한 사회 구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전사로 훈육하고 교육하는 20년의 고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오직 ‘더 나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매 순간 경쟁이라는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아이도 엄마도.
사회에서 정답이라고 말하는 ‘교육 로드맵’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친절하다. 명문대 입학이라는 최종 목표 아래 태교부터 영유아 사교육, 그리고 초·중·고를 관통하는 입시 사교육은 선택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 옵션이며 필수 조건이다. 4세 고시의 주범이 된 영유아 영어 교육, 7세 고시가 필수라는 특별한 수학 학원 등 '남들보다 한 발 앞서기' 위한 조기 투자는 끝없는 군비 경쟁의 시작이다. '안 시키면 뒤처진다'는 불안에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무한 경쟁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사교육비 지출이 가계 경제를 위협한다 해도. 부모의 정보력이 곧 아이의 미래라는 사회적 압박이 버겁다 해도. 아이를 쉬게 하면 불안해지는 탈락 공포의 심리전에 순응하며 아이의 경쟁력 확보가 부모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 된다.
모든 부모는 아이에게 따뜻한 공감과 바른 인성을 가르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착한 아이'보다 '성공할 전사'를 요구한다. 냉정한 성과와 효율을 요구하는 현실에 훈육도 교육도 변질된다. 사랑이 담긴 훈육은 시간 낭비 없는 ‘효율적인 통제’로 바뀐다. 아이의 숙제, 시험, 스케줄 관리는 '사랑'이라는 훌륭한 가면을 썼지만 통제이고 압박일 뿐이다. 부모는 아이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칭찬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경쟁 우위'를 택한다. 그러면서도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자신의 엄격함을 후회한다. 좋은 부모의 기준에 미달한다고 느끼는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이불 덮고 자책하는 날이 허다하다.
K-육아와 K-교육, 그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부모 자신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개인의 꿈과 취미는 ‘있었던 것’으로 취급하며 포기하거나 축소하고 사회적 경력 단절도 감수한다. 과도한 개입이 아이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안 때문에 기꺼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는 '자발적 노예'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이의 교육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20년간, 지속되는 긴장감과 피로는 부모의 정신 건강을 갉아먹으며, 우울증, 무기력증 등 부모의 내면적 소진으로 이어진다. 부모는 아이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고독한 내전(內戰)을 치르고 있는 셈이다.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대한민국 부모의 20년은 냉혹한 사회를 향한 전투이자, 나를 지우는 고독한 내전이다. 부모는 아이를 잔혹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강한 '전사'로 키우기 위해, 불안과 죄책감 속에서 끝없이 나 자신을 희생한다. '경쟁력'이라는 이름의 무한 군비 경쟁을 멈추지 못하면 결국 아이의 성공은 부모의 소멸이라는 비극적 아이러니와 마주할 수도 있다.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마침내 전투를 끝내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들의 승리(?)는 과연 소진된 부모의 진정한 '종전(終戰)'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