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번 학기에 고3 국제경제 심화 수업 맡아주실 수 있으신가요?"
국제경제라는 과목과 새로운 학생을 마주할 수 있다는 설렘에 덜컥 승낙했다. 기쁨도 잠시 학부생 때도 국제경제 수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가 가르칠 수는 있단 말인가. 대다수 학생이 선택해서 듣는 과목이 아닌 만큼 교과서도 기존 수업자료도 없기에 더욱 막막했다. 주변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하여 조언을 듣고서야 한 발짝 나설 힘을 얻었다.
열두 척 배와 같은 열두 명의 소수정예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시작했다. 내가 첫 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할까. 너희와 하는 수업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서툰 모습이 있겠지만, 처음이기에 더욱 노력하겠다고. 첫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누군가와 처음 사랑하면 그 사랑이 첫사랑이듯 너희들도 나의 소중하고 애틋한 첫 사랑같은 첫 제자라고.
매번 강단에 오르는 일은 첫사랑을 마주하는 것만큼 떨렸다. 계단 한 칸 정도 솟아있는 강단을 오를 때면 책임감도 부담도 덩달아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교사와 학생은 항상 수평적인 위치에 있을 수는 없지만, 너희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물리적 위치에 있을 때면 마음이 불편했다. 처음 맡아보는 과목과 그것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에 부담이 컸지만 역설적이게도 너희가 있기에 마음이 편했다. 전날 잠을 설쳐도 너희를 보는 순간만큼은 에너지와 엔돌핀이 돌았다. 나를 봐주는 생기있는 예쁜 눈빛에 겁도 났지만 기쁨을 느꼈던 게 기억난다.
어디까지 얼마만큼 가르쳐야 할까 고민하고 걱정했다. 아직 고등학생이고 정규교과 외에 개설된 수업을 듣기 힘든 순간도 있었을 텐데 잘 따라와 주었고 예리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만약 중국이 민주주의였다면 과거처럼 경제 성장을 했을까요?' '남미에서 유난히 포퓰리즘 정치가 많이 보이는데, 유행처럼 번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재치 있고도 허를 찌르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공부하면서 나도 많이 배웠다. 수업내용 정리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을 차분히 써 내려가는 모습에 내가 더 많이 배웠다. 졸음이 몰려오는 아침에도 깨려고 하는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프고 고마웠다. 한 글자라도 더 적으려는, 무엇인가를 위해 알뜰히 노력하는 너희의 모습에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어디에서든 쉽게 잠자리에 드는 내가 항상 수업 전날에는 별을 세는 날이 많았다. ‘이렇게 전달하는 게 최선일까, 이런 내용까지 말해도 되는 걸까?’ 수업 전날까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막상 수업 당일에 너희를 보면 말이 나오지 않는 나를 볼 때면 교사인 내가 미웠다. 계속해서 성장할 너희에게 내 의견이 개입하여 한쪽 면만 바라보지는 않을지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고민도 많이 했다. 한창 바쁘고 조마조마할 시기에 너희의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닐까 마음이 무거웠다.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나의 지난 이야기를 할 때면, 혹시나 젊은 어른의 지나간 잔소리쯤으로 들릴까 싶어 말을 아끼게 되는 날도 있었다.
지필평가, 수행평가 그리고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까지 마무리하니까 실감이 난다. 마지막 수업이 다가오고 있구나. 지난봄과 다가오는 여름을 함께한 우리의 시간을 1,500바이트 안에 담아내야 하고 변별력 있는 문제와 점수로 등급을 나눠야 한다는 규정이 참으로 미웠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아린다. 너희가 바라는 만큼 잘 되어야 할 텐데, 이 수업이 너희의 수시에 십 분의 일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을 텐데. 그래도 작은 욕심이 있다면, 지루했던 너희의 일상에 조금이나마 작은 삶의 활력소가 되었기를, 조금이나마 양질의 교육 경험을 한 시간이었기를 바란다.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하늘이 잘 보이는 곳에서, 열두 척의 배보다 더 든든한 열두 명의 너희를 만났다.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하고 답답하여 마음의 파도가 울렁거릴지도 모르겠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싸우고 있다곤 느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희는 언제나 나의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열두 척의 배였다. 언젠가 내가 말했듯이 혼자라고 느껴질 때 나는 항상 너희의 편일 거라고. 나는 너희를 묵묵히 믿어주고 안정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깊은 바다가 되고 싶다. 소중한 너희들의 선전(善戰)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