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B여중에 있었을 때 일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매월 1일은 급식비로 현금 3만 원을 주는데 그날은 여교사들이 모여서 회식도 하고 일명 반지계를 한다. 10명이 3만 원씩 30만 원을 한 사람에게 뽑기로 몰아주면 금은방에 가서 목걸이나 반지 귀걸이 등을 맞추곤 하였다.
식당에 도착하면 선배 선생님이
“얘! 18호봉 밑으로는 저리 가. 숟가락 빨리 놓아라.” 하는데 속으로
‘아고! 나는 언제 18호봉이 되노? 10년쯤 되면 나도 베테랑이 될 텐데.’
부러워하면서 경력이 빨리 채워지도록 기대했었는데... 마음은 그대로인데 세월은 쏜살같이 달려가는구나!
큰 애도 겨울 방학 중에 낳아서 두 달 출산 휴가도 덜 끝났는데 새 학교로 이동해서 3학년 담임으로 근무했다. 둘째도 여름 방학과 겹쳐서 제대로 못 쉬고 휴직도 안 하고 열심히 근무했다. 동료 교사들이 휴직하는 동안 그녀가 하던 영어과 일을 했다. 하지만 만기가 덜 되었는데 TO 감 되어서 강제 내신을 되게 되었다. 마음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근무도 더 열심히 하고 영어과 일을 더 해도 TO감(무조건 그 학교 오래 근무한 순서로 TO감 되도록 내규를 그때 정함)이 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규정이다.
그래서 셋째 막내를 낳고는 꿈같은 휴직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어린아이 셋 키우기는 좀 힘들까? 육아보다 빨리 복직하고 싶었다.
다시 다닐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이 그때는 행복했다.
영어 교사로서 정체성에 한계를 느꼈다. 20년쯤 되니 영어는 내가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고, 완벽하고 마음이 뿌듯한 수업이 아니니 수업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감도 낮아졌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교사자격증을 받고 특수교사로서 전과를 하고는 정말로 날아갈 듯이 기뻐서 하고 싶은 일을 기획해서 많이 했다. 아끼는 제자 중 3명이 영어교사가 되어 보람도 있었지만, 특수교사가 되어서 더 많이 일했고 영어교사 때 보다 행복하고 보람도 있었다.
학습연구년은 월급은 그대로 나오면서 연수원 파견근무로 학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공통 주제와 개인 연구 주제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7명의 초중고 교사들이 함께 공부도 하고 여행도 했다. 대단위 학교 인성부장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힘들었는데, 학습연구년은 많은 것을 깨닫고 나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게 해 주었고 인생의 속도를 한 박자 늦추어 주었다. 정말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전공 수업은 사범대 C교수님의 문학치료 박사과정 수업을 들었는데 가방을 메고 낮에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닌다는 것이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너무 행복했다.
수업이 저녁 7시에 시작하면 밤 9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끝난다. 카페의 공부방에서 9명이 하였는데 정식 박사과정 수강생은 한 명이고 나머지 8명이 나처럼 청강생이었다. 직업이 병원 심리치료사, 다른 대학교수, 의사, 위클래스 상담사. 교사 등 다양했는데 임상실습 치료 과정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다시 읽어 보고 수업을 받으며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완벽한 엄마만 보았고 엄마도 엄마 되는 것이 처음이어서 힘들었을 것이고, 나이 들어도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수업 덕분에 더 성숙해졌고 8월에 형제들과 편안하게 친정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모든 의식을 정성스럽게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이 안동이다 보니 잘 곳이 없어 부득이 딸이 대학 기숙사에서 나와서 일 년 동안엄마랑 살게 되었다. 원룸에 한 주에 하루씩 살면서 독립적인 딸과 생활도 하고 반찬도 해 주고 소소한 행복들이 그림처럼 좋았다. 고등학교부터 외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 주관이 뚜렷한 딸과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모처럼 일 년 동안에 일대일 데이트도 하고 친구 사이가 되었다. 수업하시는 교수님과 나이도 같고 대화도 잘 통하고 르네상스홀에서 식사도 딸내미까지 대접받고 인생 상담도 받고 너무 좋았다.
나는 전업주부들이 잘 정리하는 집안 살림을 잘 정리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이상으로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데 실제로는 초임 때 수첩일기까지 버리지를 못했는데 그때 정리수납 2급 실기과정을 배우면서 책 정리, 냉장고 정리, 옷 정리. 베란다 정리 등 과제 수행을 하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요리에 약해서 홈플에서 스타일리시 저녁 요리 강좌를 듣고서 다양한 요리를 접해 보았고 그 해는 김장까지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제일 좋았던 점은 교사 아닌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초등 총동창회 총무, 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까지 졸지에 하게 되어 송년회, 신년회. 재경 체육대회 등 서울 부산으로 불려 다니고 선배 언니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가서 인사도 시켜 주시고 허물없는 초등 동기들과는 국내 짧은 여행을 함께 다녀서 행복했다. 카카오스토리를 보니 학교 탐방도 하고 청산도 여행. 홍콩 여행, 7박 8일의 스페인 여행 등 앨범을 보니 아름다운 추억이 많았다.
제일 기억나는 연수는 전국의 20명 영어교사들과 미국 델라웨이 대학에서의 한 달 연수! 교직 20년 차, 결혼 17년 차 2004년 9월에는 세 아이의 엄마 역할 외에 시할머님 생신, 시어머님 생신, 추석이 들어있는데 한국을 벗어났다. 직장과 결혼생활을 잠시 벗어나서 타임슬립해서 다시 20대 대학시절로 돌아간 듯 하였다. 댈라웨이 어학연구소의 수업은 신기하고 생동감이 있어서 긴장되면서도 재미있었다. 저녁마다 자전거 타는 분, 배드민턴 치는 분들과 체육관에서 운동도 하고 자유 시간을 보냈으며 주말마다 미국 동부 주요 지역과 캐나다까지 우리들끼리 여행을 했다. 그때 남선생님들은 빨리 한국에 오고 싶어 했고 여 선생님들은 한 달 후 거의 한국에 오기 싫어했다.
그 외에도 나라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에 중국, 베트남, 일본을 다녀왔다. 열정적인 선생님들과 생활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보고 듣고 깨달았다. 서로 밤새도록 토론하며 그들의 열정과 지혜가 너무 좋았다. 특히 룸메이트를 한 분과 오래도록 연락하고 앨범도 같이 만들었다. 앨범을 보면 그분의 표정과 얼굴이 새록새록 기억난다.
그 전해 먼저 책을 낸 교무부장의 권유로 책 쓰는 선생님을 알게 되어 출판 기획서를 준비해서 제출했는데 운이 좋게 선발되었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하면 책 쓰기를 참 잘했다는 것이다. 교직생활 39년 차 여름방학에 매일 도서관에 가서 하루 한편씩 가슴속의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서 총 367쪽 38화의 이야기를 담았다. 옛날 일기장과 수첩을 뒤적이며 웃다가 울기도 하고.... 책을 쓴다는 것은 앞으로만 달리던 내 삶을 멈추게 하였고 내 자신을 뒤돌아보고 성찰하게 되었으며 글 쓰는 동안 내 자신이 위로가 되었다. 내용은 거의 경험이고 수기에 가까운 이야기들이어서 어디까지 드러낼지 용기가 필요했고 고민도 되었지만, 과감히 마음속의 이야기들을 잘 풀어낸 것 같아서 속이 후련하였다.
돌이켜보니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오랜 기간의 교직 생활에 휴직, 전과, 해외연수, 학습 연구년, 책 쓰는 선생님 등 터닝포인트가 있어서 잘 견디고 보람 있고 즐겁게 보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