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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Oct 26. 2024

제15화. 교직에서 터닝포인트

  요즘은 자꾸 이직하는 것이 몸값을 올리고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는데, 우리 때는 그저 우직하게 한 직장을 평생 다녀야만 잘하는 줄 알았다. 내년이면 정년인데 나도 내가 이렇게 교직에 오래 있을 줄 몰랐다. 그냥 버티고 열심히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줄 알았고 강산이 네 번 바뀌도록 교직의 세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옛날 B여중에 있었을 때 일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매월 1일은 급식비로 현금 3만 원을 주는데 그날은 여교사들이 모여서 회식도 하고 일명 반지계를 한다. 10명이 3만 원씩 30만 원을 한 사람에게 뽑기로 몰아주면 금은방에 가서 목걸이나 반지 귀걸이 등을 맞추곤 하였다. 

식당에 도착하면 선배 선생님이 

“얘! 18호봉 밑으로는 저리 가. 숟가락 빨리 놓아라.” 하는데 속으로 

‘아고! 나는 언제 18호봉이 되노? 10년쯤 되면 나도 베테랑이 될 텐데.’ 

부러워하면서 경력이 빨리 채워지도록 기대했었는데... 마음은 그대로인데 세월은 쏜살같이 달려가는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교사 생활을 오래 하도록 한 세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셋째를 낳고 휴직했기 때문이다. 큰 애도 겨울 방학 중에 낳아서 두 달 출산 휴가도 덜 끝났는데 새 학교로 이동해서 3학년 담임으로 근무했다. 둘째도 여름 방학과 겹쳐서 제대로 못 쉬고 휴직도 안 하고 열심히 근무했다. 동료 교사들이 휴직하는 동안 그녀가 하던 영어과 일을 했다. 하지만 만기가 덜 되었는데 TO 감 되어서 강제 내신을 되게 되었다. 마음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근무도 더 열심히 하고 영어과 일을 더 해도 TO감(무조건 그 학교 오래 근무한 순서로 TO감 되도록 내규를 그때 정함)이 된다는 것은 불합리한 규정이다. 

  그래서 셋째 막내를 낳고는 꿈같은 휴직을 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어린아이 셋 키우기는 좀 힘들까? 육아보다 빨리 복직하고 싶었다. 나올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것이 그때는 행복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전과를 했기 때문이다. 영어 교사로서 정체성에 한계를 느꼈다. 20년쯤 되니 영어는 내가 아니어도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고, 완벽하고 마음이 뿌듯한 수업이 아니니 수업에 한계를 느끼고 자신감도 낮아졌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교사자격증을 받고 특수교사로서 전과를 하고는 정말로 날아갈 듯이 기뻐서 하고 싶은 일을 기획해서 많이 했다. 아끼는 제자 중 3명이 영어교사가 되어 보람도 있었지만, 특수교사가 되어서 더 많이 일했고 영어교사 때 보다 행복하고 보람도 있었다.   

  

  세 번째 이유는 학습 연구년 때문이다. 특수교사 13년 교직 33년 차. 운 좋게 학습 연구년 교사에 선발되었다. 학습연구년은 월급은 그대로 나오면서 연수원 파견근무로 학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공통 주제와 개인 연구 주제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7명의 초중고 교사들이 함께 공부도 하고 여행도 했다. 대단위 학교 인성부장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힘들었는데, 학습연구년은 많은 것을 깨닫고 나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보게 해 주었고 인생의 속도를 한 박자 늦추어 주었다. 정말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전공 수업은 사범대 C교수님의 문학치료 박사과정 수업을 들었는데 가방을 메고 낮에 대학 캠퍼스를 돌아다닌다는 것이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너무 행복했다. 

  수업이 저녁 7시에 시작하면 밤 9시 반에서 10시 사이에 끝난다. 카페의 공부방에서 9명이 하였는데 정식 박사과정 수강생은 한 명이고 나머지 8명이 나처럼 청강생이었다. 직업이 병원 심리치료사, 다른 대학교수, 의사, 위클래스 상담사. 교사 등 다양했는데 임상실습 치료 과정을 돌아가면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다시 읽어 보고 수업을 받으며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부터 완벽한 엄마만 보았고 엄마도 엄마 되는 것이 처음이어서 힘들었을 것이고, 나이 들어도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 수업 덕분에 더 성숙해졌고 8월에 형제들과 편안하게 친정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모든 의식을 정성스럽게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집이 안동이다 보니 잘 곳이 없어 부득이 딸이 대학 기숙사에서 나와서 일 년 동안엄마랑 살게 되었다. 원룸에 한 주에 하루씩 살면서 독립적인 딸과 생활도 하고 반찬도 해 주고 소소한 행복들이 그림처럼 좋았다. 고등학교부터 외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 주관이 뚜렷한 딸과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모처럼 일 년 동안에 일대일 데이트도 하고 친구 사이가 되었다. 수업하시는 교수님과 나이도 같고 대화도 잘 통하고 르네상스홀에서 식사도 딸내미까지 대접받고 인생 상담도 받고 너무 좋았다.

  나는 전업주부들이 잘 정리하는 집안 살림을 잘 정리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이상으로는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데 실제로는 초임 때 수첩일기까지 버리지를 못했는데 그때 정리수납 2급 실기과정을 배우면서 책 정리, 냉장고 정리, 옷 정리. 베란다 정리 등 과제 수행을 하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 한 가지 요리에 약해서 홈플에서 스타일리시 저녁 요리 강좌를 듣고서 다양한 요리를 접해 보았고 그 해는 김장까지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제일 좋았던 점은 교사 아닌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초등 총동창회 총무, 고등학교 총동창회 회장까지 졸지에 하게 되어 송년회, 신년회. 재경 체육대회 등 서울 부산으로 불려 다니고 선배 언니들이 여기저기 데리고 가서 인사도 시켜 주시고 허물없는 초등 동기들과는 국내 짧은 여행을 함께 다녀서 행복했다. 카카오스토리를 보니 학교 탐방도 하고 청산도 여행. 홍콩 여행, 7박 8일의 스페인 여행 등 앨범을 보니 아름다운 추억이 많았다.    

  

  돌이켜보니 나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오랜 기간의 교직 생활에 휴직, 전과, 학습 연구년 등 터닝포인트가 있어서 잘 견디고 보람 있고 즐겁게 보낸 것 같다.      


  다시 한번 나에게 베풀어진 이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고 특히 제자들, 선후배 선생님, 친구, 가족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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