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타트업 대표의 망각
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 서울대학교 로고에 박혀있는 구절이다. 어릴 때 나는 이 구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말이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며 라틴문자로 적혀있는 것이 국립대로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이 들고는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이 구절의 강력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2010년대 ~ 2020년대 초는 미래에 어떤 시대로 기억될까? 학계에 있었던 변화는 정량화와 표준화에 대한 집착이었던 것 같다. 대학 평가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단순 참고용이었던 과거와 달리 전 세계 사람들이 조금 더 그 벤치마크를 주목하게 되었고 대학들도 이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일단 점수표가 만들어지자 그 점수를 높이기 위해 외국인 교수도 채용하고 여성 교수도 TO를 따로 마련했다. 피인용을 교수 평가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비슷한 흐름으로 국내에서도 중앙일보 대학평가가 2000년대 중반부터 시행되었고 김박사넷은 평점과 피인용 수 등으로 연구실 역량을 정량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연구 분야 관점에서는 차분히 하거나 기존 체계를 파괴하는 종류의 창의적 연구보다는 휴리스틱 개발이나 AI처럼 즉시 양적 지표가 나오는데 유리한 연구분야가 인기를 끌었다.
한 편으로는 과학자와 전문가들이 자신의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 매우 방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피어리뷰가 된 논문과 그렇지 않은 논문을 분류해서 권위를 부여하고, 연구 그룹을 만들어 정치를 통해 인정되는 "학계 주류"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시도도 많이 일어났다. 물론 가짜뉴스와 유사 과학이 이런 움직임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득 역사상 위대한 선각자들이 이 시대에 살았다면 작금의 세태를 어떻게 평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인용 수, 랭킹, 연구실 평가, 권위 있는 저널, 권위 있는 학술대회 등이 모두 학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것이 학자가 좇아야 할 빛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이런 정량적 지표는 검증을 해주는 강력한 순기능도 가지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허상을 좇게 하는 역기능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약간은 알량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정과 권위가 아닌 진리를 추구하는 것, 열심히 배우되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것, 내 손에 있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장도 열린 마음으로 들어보는 것, 그것이 학자의 빛이 아닐까. 진리는 나의 빛인 것 아닐까.
"진리는 나의 빛"을 확장하면 다른 영역에서도 각자 추구해야 하는 빛이 있다. 스타트업 업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나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빛을 잃고 껍데기에 휩쓸렸는지 모른다.
투자를 검토할 때 해외에 권위 있는 회사가 투자를 했으면 실체가 없는 모델에도 우르르 따라 투자했다. 좋은 것이 가격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오른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던 시기를 보냈다. 좋은 회사가 지표가 좋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표가 좋은 회사가 좋은 회사라 생각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몇몇 투자자들끼리 모여서 서로의 결정에서 투자 정당성을 찾았다. 클럽 딜이란 무엇일까? 클럽 딜은 피어리뷰 같은 것이다. 유명한 하우스 사람들이 투자를 했으니 옳은 투자일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다. 지표를 보고 투자한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피인용수로 논문의 가치를 평가하겠다는 것과 똑같다. 물론 그게 더 유리한 전략일지 모르겠지만, 거품이 빠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타트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역기획이 유행했다. 역기획이라는 것은 다른 기획자가 어떤 식으로 기획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는 피어리뷰로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한 회사가 대기업 경력직을 데려오면 다른 회사들도 우르르 따라 했다. 한 회사가 모델을 써서 브랜드 광고를 하면 다른 회사들도 우르르 따라 했다. 원온원 OKR 그로스해킹이 광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품이 꺼지자 그때 유행했던 것들이 중요하다 얘기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다.
학계에 진리가 있었다면 스타트업에게 빛은 무엇일까? 고객 창출이다. 기업은 고객을 창출하는 조직이다. 그에 비하면 경쟁자가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UI나 디자인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대표의 생각도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투자받고 주요 투자자에게 인정받는 것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고객을 창출할 수 있는가 하나다. 고객 창출은 나의 빛, 앞으로 나의 기본 태도로 삼기로 결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