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
고등학교 4학년의 결과가 통보된 날, 우리 집은 말 그대로 초상날이었다. 공무원 집안이라 집이 풍족하지 않았음에도 다시 한번 나를 믿어보자며 시작했던 재수생활이었다. 우리 집의 인적자원 투자는 그렇게 비극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처음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을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셨던지 여기저기 나서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을 찾으셨다. 나는 그저 앉아서 멍하니 또 시간을 보냈다. 당연한 결과라며 스스로를 인정했지만 주저앉은 현실에 대한 분노는 일지 않았다. 신기한 감정이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생각이 교차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라는 생각이 앞섰다. 어느 책에서나 나올법한 적성, 꿈 이런 단어는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 해 수능이 끝나고 한 달 후, 집에서 컴퓨터만 만지며 원서접수를 준비하던 나는 아버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삼수를 하겠다고 말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웃겼다. 정작 주어진 기회를 날려두고는 다시 해보겠다고, 믿어달라고 말하는 이 상황이 초라했다. 하지만,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시간 동안 항상 나는 시간에 몸을 의탁해 살아왔다. '학생이니까 공부해야지, 공부하니까 대학 가야지, 학원 등록했으니까 가야지.' 이런 정신머리로 항상 살아왔다. 그래서 막상 공부의 목적이 없었고, 공부는 그저 과정이고 수단일 뿐이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공부의 목적을 찾아야 했다.
아버지도 아마 어리둥절하셨을 것이다. 부모님은 항상 내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스스로 공부의 목적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는 울림 없는 메아리였다. 아버지는 알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둘 키운다는 심정으로 다시 믿어보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삼수 허락을 받은 그 날, 내가 가고자 하는 학원을 찾았다. 용인에 있는 한 기숙학원이었다. 한적한 시골 안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아예 공부가 즐거워질 수준의 환경을 가진 곳에 몸을 의탁하겠노라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9개월 간의 담금질을 통해, 나름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나의 대학교 입학식 날, 아버지는 흐느꼈다. 내가 살면서 본 첫 눈물이었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엄하셨기에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긴 시간 스스로의 싸움이었지만 좋은 결과가 나왔기에 행복했다. 지난 N수생으로서의 시간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르다고, 느리다고 하여 좋거나 슬플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