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그리고 삼수,
"흘러가듯 읽어주시고, 비판과 응원의 댓글도 남겨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
노량진에서의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학원까지 걸어가는 길은 제각기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의 바닥을 포복하는 고시생들로 가득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생활비는 당시 기준 20만원. 이 것으로 식비와 나머지를 모두 충당해야 했다. 노량진은 식권을 발급하고 뷔페식 식사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식당이 있었는데, 주로 아침과 저녁을 여기에서 해결했다. 통상 한달 치 식권을 사고 나면 거의 뭘 할 수 없는 수준의 금액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지내갔다.
당시 나는 내 스스로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었다. 재수를 해서 더 좋은 대학을 갈거라는 건 내 의지보다 가족의 의지임에 가까웠다. 난 고등학교까지 항상 수동적인 삶을 살았다. 내가 선택한 학원에 가기 보다 보내주시는 학원에 가서 불평없이 끝까지 다녔다. 공부를 하지만 이유를 모르고 했다. 그냥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하는 구나 라는 불명함이 그 목표였다. 고등학교 3학년 현역 수능을 보는 그 날, 나는 성적이 잘 나오진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수험생 현역 첫 수능성적표를 받아든 그 날이 왔다. 모르겠다. 성적표는 지난 시간 나의 소홀했던 시간을 증명해줬다. 하지만 당시 내 스스로는 딱히 죄책감도, 그냥 무언가에 대한 결의도 올라오지 않았다. 시간을 이렇게 저렇게 흘려보낸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결정에 재수생활은 정해졌고 노량진으로 올라 간 것이다. 노량진에서 고등학교 4학년으로서의 삶을 지내고 있었다. 물론 학원과 자율학습의 고리타분한 쳇바퀴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당시의 나로서는 성실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냥 그렇게 해왔던 것을 그런 방식으로 이어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나는 무너져갔다. 생활비 20만원 가량에서 반에 반을 아껴 놀았다. 놀아봤자, 고시원 주변에는 온통 나처럼 원하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뿐이었기에 친구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하루 그냥 스트레스를 풀자고 갔던, PC방과 오락실들은 그렇게 1퍼센트에서 10퍼센트가 되고 그렇게 계속 파이를 넓혀버렸다. 식권 살 돈을 아껴서 노는 시간을 보냈다. 울타리가 없었던 그 곳에서 울타리에서 돌아다니는 것에 익숙한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직접적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다시 시간을 보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달라진 건 이제 나에게 이러지 말라 저러지 말라 끊임없이 말하는 누군가가 없다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당시, 부모님의 슬픔으로 만들어 낸 금같은 시간을 머저리 같은 모습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눈물이 무색해질 만큼 말이다.
이윽고 평가원 주관 모의평가가 있던 날, 나의 한계와 과거는 다시 증명되고 말았다. 당시는 고등학교 4학년 생활의 수능이 멀지 않은 시기였는데, 나의 현실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었다. 참으로 철 없던 나는 그 당시 부모님께 열심히했는데 성적이 왜 이런지 나도 모르겠다는 식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던져댔다. 재수를 시작하던 그 해, 노량진에서 흐른 아버지의 눈물은 결국 나로 인해 한숨으로 바뀌고 말았다. 성적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나는 지나온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온 터였다. 내 삶이 그랬고, 결국 모두가 알 법한 결과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입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기. 그리고 후회되는 과거들. 그래서 나는 그렇고 그런 그냥 평범한 인재 중 하나였을 뿐이었을지 모른다. 당시 수험생의 피라미드를 생각한다면, 가장 어중간한 3층 정도의 학생이 나였다. 하면 오를 거 같고 미래가 보일거 같은 그런 애매모호한 확신을 주는 것이 나였고, 그래서 그 보이지 않을 미래를 위해 한 해를 더 투입해보자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는 무너졌다. 인생은 결국 하는만큼 나올 뿐이었고, 항상 럭키라이프를 꿈꾸는 머저리는 그에 합당한 결과로 보답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