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그리고 재수,
나는 소위 중간적 우등생이었다.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엔. 그런 나의 모습은 나를 믿는 누군가에겐 믿음을 주입시키기 좋았다. 초등학교 때까지 나는 소위 경쟁력 있는 초등학생은 아니었다. 당시의 1990년대의 국민학교는 평균점수를 통해서 각 시험의 등수를 매겼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4학년 97점의 평균을 딱 한 번 맞아본 것 말고는 단 한 번도 성적 피라미드의 정상에 서본 적은 없다. 그 당시는 586 컴퓨터가 출시되고 윈도 95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시기였다. 게임을 좋아하는 나는 딱히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없어도 있는 척하는 그런 아이였다.
중학교 시절 나는 3년간 나름의 준수한 성적을 유지했다. 물론 한 자리도 아니었으며, 과학고나 외국어 고등학교를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의 성적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던 것도 아니었다. 전교생 400명 중 30에서 50등 사이를 오고 가는 그런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차등 생이었다. 등수를 보면 그 자체로 우등에 대한 희망고문이 일어날 법 한 그런 위치였다. 주변은 나에게 희망을 가지셨다. 나름 젊은 시절 좋은 성적으로 학업을 마치신 부모님도 나의 학업 결과에 부쩍 욕심을 내셨다. 몇 개의 계단만 더 오른다면 더 높은 피라미드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그 조건이 아마 더 불을 지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등학교를 가며 나는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 그때가 나의 사춘기였던 것 같다. 부모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나는 용돈을 받지 않고 생활했는데, 문제집을 사야 한다는 거짓말로 부모님께 몇 천 원, 몇 만 원의 돈을 받아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분식을 먹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일부 원하는 학생들과 함께 바다에 간다는 약속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 셋과 함께 대천 앞바다에 놀러 갔다가, 발각되어 혼이 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 학생들이 서야만 하는 수능이라는 작은 문 앞에서야 했다. 고3 현역으로서 수능장에 앉았던 나는 너무도 초라했다. 지난 12년의 세월을 단 8시간의 시험으로 평가받는 이 가성비 최악의 현장에서 결국 마지막 시절을 집중하지 못하고 가성비가 떨어지는 학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는 순응적인 성격을 지닌 편이라, 성적을 확인했을 때 막상 화가 나기보다는 깊은 후회를 했다. 재수를 결정했다. 중간적 우등생인 나의 과거를 기억하시는 부모님은 풍족하지 못한 집 살림에도 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셨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도 제쳐둔 채 약간의 생활품목을 챙기고 노량진으로 올랐다.
살며 서울을 한 3번 정도 다녔던 것 같지만, 살기 위해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여 고시원 하나를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엔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었으니, 본인이 하나하나 노량진 고시원을 문의하여 전화로 일일이 돌리셨을 것이다. 올라가는 길 고속도로의 지나는 차들을 보면서도 나는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냥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세상의 일들은 결국 인과응보의 커다란 진리 아래 돌아가기에, 하지 않았기에 되지 않은 것 역시, 그 이상 자연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노량진 고시원은 학원에서 걸어서 30분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방을 열었다. 평수는 잘 모르겠지만, 당시 나의 키는 180cm를 약간 넘었는데, 누웠을 때 머리가 반대 벽에 닿았다. 침대는 당연하게 없었고, 책상 아래 공간으로 다리를 넣고 바닥에 누워야 잠을 청할 수 있는 한자리 평수대의 침침한 방이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절어 보이고, 바깥을 혐오하는 듯한 느낌의 패션으로 돌아다녔다.
우리 아버지는 엄하셨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그런 생각을 하며 자랐고 아버지는 엄한 만큼 단단하다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의 짐을 방으로 넣어주시며, 앞으로 여기에서 생활하며 두 번의 실수가 없게 단디 공부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나는 항상 그랬듯이 알았다는 3글자의 말로 안심을 시켰다. 그렇게 나의 재수생활은 시작되었다. 추후 듣길, 그리고 단단했던 아버지는 그 날 전주의 집으로 돌아가시며 차에서 그렇게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나는 그리도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의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그런 아들이 이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자고 저 한자리 평수의 고시원, 그리고 이 칙칙한 거리에서 1년을 살아야 한다는 그 걱정에 그러셨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눈물이란 단어를 난 내 귀로 단 한 번도 들은 적도, 눈으로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를 생각하면 18세의 나이로 처음 집에서 독립해 나의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 재수생활이었다. 물론 당시 생활을 통해 얻은 것과 배운 것도 있다. 하지만 그때의 그 절망과 가족의 슬픔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밀려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