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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아람 Nov 23. 2023

멋 부리다 얼어 죽겠다는 말을 딸한테 하는 날이 왔다

"내일도 학교를 안 간다고? 아니 니들이 수능을 본 것도 아닌데 왜 학교를 안 가?"

수능날(11월 16일) 학교를 안 가고 다음날도 안 간다는 고2, 중3 아이들에게 괜히 툴툴거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으로 우리 동네 맛집을 검색했다. 내일은 셋이서 점심에 불오징어를 먹으러 가야겠다.


다음날 아침, 학교를 안 가니 늦잠을 잘 거라고 생각했는데 중3 딸, 방실이가 여덟 시쯤 일어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빼꼼히 열었다.

"어디 가?"

"배구하러 가."

"배구가 그렇게 재밌어? 엄마는 공 날아오는 거 맞으면 아파서 싫던데."

"공 맞으면 아프긴 한데 그게 손에 잘 맞았을 때 오는 쾌감이 있어."

나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할 쾌감이다.


방실이가 거울 앞에 서서 옆태, 뒤태를 보고 있다. 오늘 날씨가 꽤 추운데 여름 반바지 체육복에 처음 보는 트레이닝복 점퍼를 입었다. 학생이 교복이랑 체육복 입으면 됐지 무슨 옷을 자꾸 사냐며 잘 안 사주니까 지 용돈으로 사 입었나 보다.

"야, 멋 부리다 얼어 죽겠다. 이 날씨에 반바지는 너무하잖아."

"별로 안 추워."

"그러다 감기 걸려. 긴바지 입어."

"나 옷 없어. 옷 사줘."

"옷장에 걸린 건 다 뭐냐?"

"엄마가 사준 거 별로 없잖아."

"그냥 반바지 입고 가도 괜찮을 거 같다."

"나가."

방실이가 나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나갈 때 보니 다행히 긴 바지로 바꿔 입었다.


방실이는 중학교를 입학하자마자 배구반에 들어갔다. 토요일이나 공휴일 아침에 모두가 늦잠을 잘 때도 혼자 일어나 학교를 갔다. 몇 달 전에 배구를 하다가 손가락 인대가 늘어나서 깁스를 했다. 그러고도 배구를 하러 가고 심지어 얼마 전 독감인지 코로나인지에 걸려 학교를 빠지면서도 배구는 하러 갔다. 공부 안 한다고 구박만 했지 배구 열심히 한다고 칭찬한 적은 없었다. 뭐든 열심히 하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인데 말이다. 오늘 옷 한 벌 사줘야겠다.


방실이가 점심때쯤 돌아왔다.

"우리 불오징어 먹고 백화점 갈까?"

"전 약속 있어서 나갈 거예요."

조금 전에 일어나 뒹굴거리던 아들이 말했다.

"난 배구 끝나고 샌드위치 먹고 왔어. 밥 안 먹어도 되니까 당장 백화점 가자. 히히."

아이들이 집에 있지만 오늘도 나는 혼자 점심을 먹었다.


방실이와 함께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백화점을 갔다. 방실이가 옷을 둘러보다 맘에 드는 옷이 있으면 가격부터 확인한다. 꼭 나를 보는 것 같다.


"가격 보지 말고 맘에 드는 거 사."

다리가 아파서 빨리 샀으면 싶었다.

"그럼 나 아까 입어본 거 사도 돼?"

결국 세일 1%도 안 하는 새빠시 신상을 골랐구나.

"어."

두 개 사주려고 했는데 하나만 사줘야지.

"내년까지 옷 사달라고 안 할게."

지키지 못할 게 뻔하다.

"됐고, 올 겨울 옷은 이걸로 끝내는 걸로 하자."

현실적인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래, 좋아."


방실이의 티셔츠와 바지, 아들의 패딩점퍼를 사들고 집을 향해 걸었다. 방실이가 저만큼 앞서간다.

"좀 천천히 가."

"엄마, 걸음이 왜 이렇게 느려?"

방실이가 멈춰서 나를 기다린다.

"천천히 가. 빨리 가면 똥 밟아."

"하하. 내가 똥을 좀 잘 밟았지."

방실이가 초등학생 때 새 신발을 신고 나가서 똥을 밟고 들어온 적이 있다. 나한테 많이 혼날 줄 알았는데 내가 별말 없이 신발을 빨아줘서 고마웠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예쁜 옷과 신발을 그렇게 많이 사줬는데 다 잊어버리고, 똥 밟고 왔는데 혼내지 않은 건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요즘 재택근무로 집에 있다 보니 편한 옷이 많이 필요하다. 방실이의 옷장에서 사놓고 입지 않거나 방실이한테 작은 옷을 찾아서 입고 있다. 그 애가 3년 전에 신었던 230mm 운동화가 내 발에 맞는다. 지금 방실이의 발은 245mm다. 방실이가 커 갈수록 나는 점점 작아진다.



* 딸이 아기 때, 무슨 애가 잠에서 깨면 울지를 않고 혼자 방실방실 웃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별명을 방실이라고 불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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