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딸아이가 두어 달 전에 학교에서 인쇄물을 가지고 와서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쓴 뒤 공모전에 응모하겠다고 했는데, 공모전에 응모하려면 후원 신청에 동의를 해야만 했다.
"네, 맞아요."
1:1 후원 신청을 하면 도움받을 아이와 우리 아이가 1:1로 연결되어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고, 아이의 성장과정을 전달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주소와 아이 생일을 알려주고 난 뒤, 자동이체 계좌번호를 묻자 잠시 망설여졌다.
"한 달에 얼마라고 하셨죠?"
"1:1 후원은 3만 원입니다."
"지금 다른 후원금 내는 것도 있고 해서 3만 원은 부담스러운데 조금 낮출 수는 없나요?"
"3만 원이 부담스러우시면 그 미만으로도 하실 수 있는데 1:1 매칭은 되지 않아요."
"죄송하지만 아이와 상의해 볼 테니 내일 다시 연락 주시겠어요?"
전화를 끊고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의 꿈을 이루고 어려운 이웃들의 꿈을 찾아주고 싶다고 다짐한 내가 3만 원의 후원금에 이렇게 망설이다니... 산책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후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얼마 전 보이스피싱 관련해서 본 방송 내용이 생각나면서, 전화번호를 검색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전화번호를 인터넷 검색창에 검색하면 어디 전화번호인지 뜨는데, 그 번호는 검색이 되지 않았다. 굿네이버스 전화번호를 검색해 봐도 어느 지부에도 속하지 않는 번호였다.
"보이스피싱이었을지도 몰라"
저녁에 집에 놀러 온 언니와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니 애가 셋이야. 후원 안 해도 돼."
딸에게도 굿네이버스 상담사와 통화한 이야기를 하며 영어로 편지 쓰기 힘들지 않을까, 조금 귀찮지 않을까 하며 아이가 후원을 원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이끌어 버렸다. 나는 나의 망설임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렇게 나 자신을 속였고, 그다음 날 산책 중 또다시 걸려온 전화를 아예 받지 않았다.
전화를 거부한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산책길을 평소보다 오래 걸으며 핑곗거리를 찾았다. 내 옷장에는 3만 원이 넘는 옷이 별로 없다. 아웃렛 이벤트홀이나 인터넷으로 구매한 저가의 티셔츠나 바지를 주로 입고 다닌다. 아이가 셋이어서 들어갈 돈이 많은 나를 걱정하는 엄마와 언니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면서도 나는 언젠가 나중에 다 갚을 거라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가 얼굴도 모르는 먼 나라 아이를 후원하는 건 오지랖이 아닐까? 그런 나한테 딱 3만 원도 아니고, 매달 3만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닌 건 맞는데 왜 계속 나 자신이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걸까?
일단 보이스피싱인지 아닌지 확실히 확인을 하자 싶어 굿네이버스 희망편지 쓰기 대회 본부로 전화를 걸어 나한테 걸려온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확인을 요청했다. 그쪽 전화번호가 맞다는 확인을 받았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회피하기 위해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현실을 왜곡하며 살았는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전화가 보이스피싱이었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부담스러우면 못하겠다고 다음에 하겠다고 하면 되는데 난 그 말을 못 하고 이틀째 고민을 반복하고 있었다. 언젠가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고 싶은 마음은 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내 그릇은 그만큼은 아니다. 솔직한 나의 마음은 우리 아이들이 그 척박한 아프리카 같은 땅에 살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감, 그곳에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그 정도의 마음이다. 혼자 속에 품고만 있어도 될까, 3만 원을 후원해야 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딱 그만큼의 작은 그릇인 내가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사흘째 산책을 하던 나는 마침내 가벼운 마음으로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두어 달 전 단식을 하면서 시작된 나의 점심시간 산책, 지금은 음악에 빠지거나 생각에 잠겨 걷는 혼자만의 산책 시간이 너무 좋아 점심에 단식을 한다. 내가 점심을 먹지 않음으로 해서 아끼는 돈은 하루 1만 원 정도이고, 한 달이면 20만 원이 된다. 점심을 안 사 먹어서 남아야 하는데 통장에는 남아있지 않은 바로 그 돈~!
이번 달부터 그 돈을 따로 챙겨 두었다가 나의 행복을 위해 쓰고자 한다.
세 번만 굶으면 되는 3만 원
3일간 점심을 굶는 것은 내겐 너무 쉬운 일이다. 한 달의 점심 산책으로 아프리카 소년의 후원자가 되고도 17만 원이 남는다. 3만 원이 나갈걸 생각하며 고민하던 내 마음이 17만 원이 남는다는 생각으로 행복해졌다.
나무가 울창한 산책길 벤치에 앉아 가만히 소리를 들어본다. 새들이 노래 부르고 바람이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들어 연주를 하는데, 피처링으로 어린이집 아이들 웃음소리 까지... 세상 최고의 하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