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금쪽같은 내 새끼' 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와 어떻게 저런 애가 있을까,
부모는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주인은 정말 얼마나 힘들까,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그러나 금쪽이나 세나개의 모든 에피소드들을 자세히 파고들기 시작하면,
아이와 강아지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에 앞서
양육자의 문제가 도드라지게 된다.
더욱이 신기한 것은
양육자의 태도를 바꿔주면
아이나 개의 문제행동이 놀랍게도 개선된다는 것.
우리는 개를 키우거나 아이를 양육하면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친다.
이렇게 하면 애가 더 망가질까
되려 크게 야단을 쳐보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수용을 해줘야 아이가 편하게 마음을 가질 것 같아
뭐든지 수용해줘야 하는 것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지나치게 그들을 수용해 주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지점이 있다.
"이러다가 부모 혹은 주인 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수용해주다 보면 나를 더 만만히 보는 것이 아닐까?"
그 권위라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
권위를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해님과 나그네
해님과 나그네라는 이솝우화에 보면,
해님과 바람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겉옷을 누가 먼저 벗기는지 내기를 한다.
바람은 열심히 바람을 불어댔지만 나그네는 앞섶을 더 강하게 여미었다.
해님의 차례가 되었다.
해님은 따스한 햇살을 강하게 내리 쭸다.
따뜻함을 느낀 나그네는 그 따스함을 만끽하기 위해 겉옷을 스스로 벗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다.
하물며,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사람의 행동은 두말할 것도 없다.
남이라면 그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문제도,
내 아이의 문제가 되면 매우 심각해진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에 불안함을 느낀다.
원래 인간이란 게 그렇다.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불안함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으레 생각해내는 방법이 협박과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너, 이렇게 하면 엄마가 폰 뺏는다!"
"다음 시험에서 90점 못 넘으면 용돈 줄일 거다!"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 처벌받을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니 무서워진 아이들이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뿌듯하다.
부모님을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부모로서의 권위를 인정받는 듯하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니
이것이 그들보다 위에 있다는 증명이라도 받은 듯하다.
그러나 권위와 존경은 그런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권위와 존경은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는 무언가다.
공포정치는 한계가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공포정치가 어느 정도 먹힐지 모른다.
아이들은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를 선택하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을 선택한 것은 부모였다.
아이들의 세상에 부모는 우주이며 자신의 전부인 세계이다.
아이들의 그 세계가 점점 커 나가면서,
자신의 세상에 부모 외에 다른 것들이 차곡차곡 차오르며
그 아이는 독립을 준비해 나가고 사회에 적응해 나간다.
그리고 독립의 본능이 점점 커지면서 그들은 부모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공포를 주고 협박하고 두렵게 하여 자신을 통제한 부모가 보이게 되면서
아이들은 서서히 저항을 하기 시작한다.
아니, 서서히 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거세게 저항한다.
아직도 권위라는 것이 공포와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에 당황을 넘어서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더 억압하고 통제하려 한다.
그러면, 아이는 더욱 무섭게 반발하고 반항한다.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해 그리고 존중
오은영과 강형욱의 기본적인 논조는 크게 보면 동일하다.
두 분 모두 '이해'와 '존중'에 그 뿌리가 있다.
아이를, 개를.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해보려고 하고,
그리고 그들을 독립된 개체로서 존중해주는 것이다.
해님도 나그네라는 사람과 겉옷에 대한 이해가 먼저였다.
언제 인간이 겉옷을 입는지 먼저 이해했다.
추울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벗을 때는 덥거나 갑갑할 때였다.
해님은 나그네를 하나의 개체로 존중하고 인정해주었다.
강요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았다.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했다.
바람처럼 바람을 세게 일으켜 억지로 벗겨내려 하지 않았다.
나그네는 스스로 옷을 벗었다.
바람이 강제로 벗기려 할 때는 그렇게 꼭 여미었던 앞섶을, 나그네는 스스로 벚어젖혔다.
통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부모로서의 권위는
공포를 조장하고 통제를 강하게 한다고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 방법이 먹히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다.
아이에게 선택권이 없을 때.
그리고 아이의 세상에 부모밖에 없을 때이다.
그러나 아이는 시간이 지나며 자라나고
훗날에는 독립을 하는 나이가 온다.
자신의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이 존재함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침해받지 않고 싶어 한다.
우리만 해도 누가 당장 어떤 것을 시키면 저항심이 생기지 않는가.
하다못해 옷을 사러 가도
갑자기 옆에서 직원이 사라고 홍보를 하면
사기 싫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인간은 모두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
이 이해가 먼저 바탕이 되어야 아이를 존중해 줄 수 있다.
왜 사람들이 강주은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왜 상남자 최민수가 강주은 앞에서만은 순한 양이 되는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엄마가 뭐길래'라는 예능에 보면
강주은은 아이들을 대하는데도 한결같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한다.
아이에게 협박이나 통제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엄마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존중하고 따른다.
따뜻하고 관대하지만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가르친다.
그것이 권위를 얻는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지금은 부모가 전부일 지 몰라도,
아이들은 크면서
부모를 제삼자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내가 두려워했던 대상은
사실 나를 지지해주고 아껴줘야 했던 대상임을 말이다.
내가 기댈 수 있어야 했던 대상임을 말이다.
그때 그 분노는 어찌할 것인가?
해님과 나그네의 교훈은 간단하다.
이해와 존중.
그러나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솝우화로 그려졌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도덕과 가치관이니 말이다.
쉽지 않겠지만
불안함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것을 고함과 협박으로 푸는 방법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불안함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수신(修身),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부터 들여다보고 어루만져주는 것이 우선이다.
결국 결론은
나에 대한 '이해'와 '존중' 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어떤 것이든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마음속 평화는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내 마음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으로부터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
그 뒤에 아이에게
깊은 이해와 존중으로
관대함과 따스함을 전제로 대하자.
안 되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꼭 혼낼 필요가 없다.
안되는 것이 왜 안되는지 설명하면 된다.
그리고 아이는 아이이다.
한번 말한다고 바로 익힐 수 없다(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여러 번 알려주어야 한다.
꼭 그 과정에서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고 협박할 필요는 없다.
따스한 해님의 태도로 세상을 살면 그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선 이게 이솝우화로 교훈을 주어야 하는 정도로 힘든 자기 수행을 거쳐야 하는 일임을 깨닫고,
어렵지만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우리 내면의 불안함과 화를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권위는 찾지 않아도 자연스레 내 옆에 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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