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세모, 네모
*스포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전체 구성 평가를 위주로 스포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을 종합해 보면은
누가 갑자기 게임을 하면
수백억을 준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시키고
그래서 걸리면 막 쏴 죽이더라
그런데 선생님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오게 됐고
그 사람들 얼굴도 모르고 거기가 어딘지도 모른다
이거 맞죠?
인생의 막장에 다다른 사람들이 초록색 추리닝 위에 각 번호를 달고 낯선 곳에 도착한다. 세상에서 고립된 이 비현실적인 장소에는 동그라미, 세모, 네모 그리고 검은 얼굴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든 것을 컨트롤한다. 자는 것도 먹는 것도 사는 것도. 456억이 걸린 게임은 카지노 같은 게 아닌 그저 추억의 놀이다. 대신 피구에서 공을 맞으면 죽는다고 표현하는 말에서 따온 건지 놀이에서 진 사람들은 실제로 죽는다. 이 기괴한 미스터리 판타지 드라마는 예고편부터 여러 사람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동안 배우들의 티켓 파워에 휘둘리며 실패할 확률이 낮은 남녀 주인공의 천편일률적인 사랑 이야기를 양산하던 한국 콘텐츠 계의 새로운 바람이 분다는 기대감 때문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0426
어? 내 생일 맞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힘은 막대하다. 그놈의 돈 때문에 사람은 한없이 자만해지기도 하며 한없이 비굴해지기도 한다. 적당한 돈은 적당한 삶을 위해 필요하지만 역시나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돈은 문제를 일으킨다. 돈에 체하거나 돈에 굶주린다. 돈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주어질 456억은 누가 보아도 체하기 좋은 크기의 돈이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돈 덩어리와 오징어 게임은 어떤 연관이 있기에 드라마의 제목으로 뽑혔을까.
성기훈 1974년 10월 31일생
황인호 1976년 02월 02일생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장점은 탄탄한 자본력과 세계적인 인기를 가진 거대 매체가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뿌린다는 데에 있다. 약간의 미국 취향이 가미될 수 있음을 고려해야겠지만 미국과 같은 거대국가의 자본력이 각 국가에 사용되는 기회는 말 그대로 황금 같은 기회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실패하지 않을 콘텐츠'에만 초점을 맞춰 돈을 쓰는 경향이 강하다. 최근 들어서 조금은 도전적인 시도를 하려는 모습이 종종 보이긴 해도 여전히 따져보면 이미 아는 구조의 반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넷플릭스의 위압적인 돈의 양은 그동안 억눌려온 '실패할지도 모르는 콘텐츠'에 도전할 수 있는 문턱을 현저히 낮췄다. 만약 넷플릭스가 아니었다면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필요한 사극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좀비라는 소재를 섞어 쓴 '킹덤'은 겨우 책으로 볼 수 있는 게 전부였을지 모른다. 게다가 모체가 한국에 있지 않은 기업이라는 점도 하나의 장점으로 작용하면서 이제까지 아무도 건드릴 생각도 못 하던 군대 문제를 꺼내 놓은 DP가 세상에 빛을 봤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은 어떤 장점을 이용해 냈을까.
투자에도 그런 말이 있어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회사에서 쫓겨나고 사업도 쫄딱 망한 주인공 기훈은 이제는 경마장을 전전하다가 사채업자들에게 두들겨 맞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아내도 딸도 잃고 겨우 자신의 어머니만이 그의 곁에 남은 마당에 그는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가 그려진 명함을 받고 456억이 걸린 게임에 참여한다.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가 그려진 검은 가면을 쓰고서 모두 똑같은 옷을 입은 게임의 진행자들은 로봇인지 사람인지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인다. 자신처럼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희망이라곤 없이 그늘진 얼굴을 가졌을 뿐이다. 칙칙한 참가자들과 달리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들은 예쁘기보다 이질스러움을 자아낸다. 그들이 시작하게 된 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어린 시절 한 번쯤 해봤을 놀이에 단 한 가지 특이점은 걸리면 진짜 죽는다는 것이다. 귀여운 인형 같던 술래는 잔혹하게 게임을 이행한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예고편에서 보고 매력을 느낀 부분들이다.
이달 24일이 우리 아들 생일이거든
로보트 장난감을 사주기로 했는데
작년 생일 때 내가 깜빡하고 아무것도 못해줬어
이번에는 꼭 해줘야 하는데
아 맞다 뭐라고 했지?
그런데 문제는 점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묘한 미스터리는 어디로 가고 점점 등장인물들의 신파가 시작된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색다른 소재라는 포장지 안에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가장 자주 해왔던 전형적인 방식의 전개가 가득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은 욕심이었는지 아니면 포장지를 따라갈 실력이 부족했던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대부분 예상 가능한 반전 요소를 마치 서프라이즈 선물처럼 몇 화에 걸쳐 고이 모셔뒀다가 밝히는 거로 미루어보아 아마 후자 일지 모르겠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또한, 한국에서 누아르 물들이 자주 좋은 성적을 내곤 하는데 그 이유가 자극적인 장면들의 향연에 있다고 생각했던 건지 아무런 상징도 의미도 없이 자극적이기만 한 장면들을 끼워 넣어서 오히려 흥미를 떨어뜨렸다. 특히나 마지막화에 가까워질수록 으악스러운 연출과 스토리의 향연이었다. 오죽하면 후반부와 전반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제작한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그럼 자네가 날 속이고
내 구슬 가져간 건 말이 되고?
뒤로 갈수록 예산이 부족해진 건지 시간에 쫓긴 건지, 혹은 이외의 이유가 있는 건지 실망이 커져갔다. 초반부에 오징어 게임이라는 제목에 맞춰서 기괴하도록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조금이라도 보였는데 후반부에는 이런 판타지적인 요소를 완전히 포기해버린 모습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떡밥이 회수되지 않고 무조건 다음 시즌을 만들겠다는 일념 때문에 답답증을 유발하는 느림보 스토리를 만든 탓도 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오징어 게임'이어야 했냐는 의구심만 늘어갔다. 사실상 게임 진행자들에게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의 가면을 씌우기 위한 것 외에는 오징어 게임은 아무런 쓸모도 의미도 없었다.
정말 좋아하는 부류의 드라마였기에 예고편을 보고 기대가 컸다. 그래서 4화 정도까지는 스스로 나쁘지 않다며 다독이면서 계속 봤다. 잘 알지 못했던 배우분들의 연기력에 종종 감탄했다. 점점 연출에 실망하고 전개 방식에 실망하면서도 극단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과 극단적으로 돈이 적은 사람들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보여주려는 걸까 하는 작은 기대도 끝까지 놓지 않았다. 그런데 끝까지 본 대가가 이거라니 실망스러웠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고 그저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장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한 조각의 희망이 부서진 기분이다. 게다가 중요한 인물의 숨겨진 이름을 자막에서는 진작에 등장시키는 바람에 감동을 극감 시키는 실수도 보였다. 이후로 여러 시즌을 낼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부디 뒤이어 나올 시즌에서는 다시 초심을 찾으면 좋겠다. 오징어 게임의 정체성이 예쁜 선물 상자 속 시체는 아니면 좋겠다.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