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의(義)란 무엇인가?

'의' 단어 구체화하기

1. 서론: 우리가 오해해 온 단어


흔히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고 있지만 막상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의(義)'라는 단어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도 의라는 단어를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쉽지 않습니다.

'의롭다', '의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예배 시간마다 듣지만, 솔직히 내 삶과는 거리가 있는 말처럼 느껴지지는 않으셨나요? 마치 성인군자에게나 어울리는 말, 흠 없이 완벽한 사람에게나 붙는 훈장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사용된 이 단어의 맥락으로 들어가 보면, '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추상적인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차갑고 딱딱한 도덕규범이 아니라, 깨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붙이고, 상처 입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뒤틀린 세상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려는 뜨거운 사랑의 행동입니다.

의를 뜻하는 구약의 '체데크'와 신약의 '디카이오시네'라는 두 단어를 통해, 성경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미하였던 '의'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읽고 나서 '아, 나도 이렇게 살아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2. 구약의 '체데크' — 관계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


의는 법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구약에서 '의'를 뜻하는 단어는 '체데크(Tzedek)'입니다.

먼저 이 단어는 관계를 전제로 정의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의는 '내가 이 관계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

창세기 15장 6절은 성경에서 '의'가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셨을 때, 어떤 근거도, 어떤 보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눈에 보이는 증거 없이 하나님의 말씀 방향으로 삶을 정렬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의 뿌리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음에도 말씀에 대해 마땅한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수많은 실수와 두려움으로 가득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뢰하는 마음을 의로 불러주셨습니다.


다말의 예

창세기 38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형사취수(兄死娶嫂)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유다의 장남 '엘'이 다말과 결혼했으나 악행으로 인해 자식 없이 죽습니다. 차남 '오난'은 형수를 통해 형의 대를 잇는 것을 거부하며 땅에 설정(사정)하는 악을 행하여 그 역시 죽임을 당합니다.

아들 둘을 잃은 유다는 막내아들 '셀라'마저 죽을까 염려하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며 셀라가 장성하면 불러주겠다고 약속하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시아버지가 약속을 어긴 것을 안 다말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창녀로 변장하고, 양털을 깎으러 온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동침합니다. 다말은 화대 대신 유다의 도장, 끈, 지팡이를 증표(약조물)로 받아 챙깁니다.

석 달 뒤 다말의 임신 소식을 들은 유다는 그녀를 불사르려 하지만, 다말이 내놓은 증표를 보고 "그녀가 나보다 옳다"라고 고백합니다.

객관적인 법의 기준으로 보면 다말의 행동은 결코 칭찬받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그녀를 의롭다고 했습니다.

다말은 무너져가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반면 유다 자신은 시아버지로서 마땅히 해주어야 할 의무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보아스의 예

룻은 모압 사람, 즉 이스라엘 입장에서 외국인이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뒤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법적으로는 아무도 그녀를 책임질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밭 주인 보아스는 달랐습니다. 율법이 명한 최소한의 의무 — 이삭 줍기를 허용하는 것 — 를 훨씬 넘어, 자신의 일꾼들에게 룻을 보호하라고 명하고, 일부러 곡식 단을 뽑아 그녀 쪽에 떨어뜨리도록 했습니다(룻기 2:15-16).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시어머니를 위해 행한 것이 다 내게 알려졌다." 그리고 나오미와의 언약적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기 위해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기꺼이 떠맡습니다.

비록 보아스의 행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의'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성경학자들은 보아스가 의를 삶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보아스가 보여준 의는, 법이 강제하지 않는 것을 사랑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의는 '해야만 하는 것의 최소치'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외침

아모스 선지자는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외쳤습니다(아모스 5:24).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나님의 의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 — 고아, 과부, 나그네 — 을 향해 흘렀습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체데크'가 사회적 약자의 권리가 회복되는 것과 직결된다고 설명합니다.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이라고요. 하나님은 화려한 예배 의식보다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원하셨습니다.


3. 신약의 '디카이오시네' —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십일조도 냈고, 금식도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5:20).

'더 나은 의'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셨으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는 '규칙을 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5장 6절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을 갈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과 부패로 인해 뒤틀린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온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와 축복입니다.


탕자의 비유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디카이오시네의 길)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마태복음 21:32)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종교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예배를 인도하고, 계명을 가르쳤습니다. 반면 세리는 동족의 돈을 착복하는 매국노였고, 창기는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마태복음 21:31).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요한의 말을 듣고 마땅한 반응, 즉 회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의는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고 난 뒤 실제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산상수훈이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디카이오시네) 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여기서 '의를 구하라'는 말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라'는 개인적 수양의 명령이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이 '의'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 즉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잡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잡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라."


사도 바울의 예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마르틴 루터가 이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의 삶 전체가 뒤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의를 쟁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를 선물로 받는 사람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대속을 믿는(마땅한 반응을 보인) 자를 하나님은 "너를 의롭다"라고 선언해주시는 것입니다.


받은 의를 살아내는 것 — 칭의와 성화

현대 신학자 N.T. 라이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의롭게 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초청이라고요.

의를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 의를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신앙의 출발점인 칭의는 삶의 변화인 성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의의 종'이 되어 세상을 향해 거룩하고 의미 있는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할 부름을 받았습니다.


4. 오늘날 우리가 놓친 것


하나님과의 관계만 중요시

오늘날 우리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 기도, 찬양, 말씀 묵상......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NLT 성경은 "둘째도 그와 같으니"의 번역을 "A second is equally important"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파괴된 하나님 나라의 질서 회복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 소위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는 파괴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였던 인간과 인관의 관계도 수직적 관계로 변질이 되었습니다.

고대근동의 나라들은 오로지 왕만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지만, 창세기에는 모든 사람, 남자와 여자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그런데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여자는 남자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인간 세계 전반에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6)

원래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나님께서 사회적인 약자를 배려하라는 명령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성 목회자의 안수와 관련하여 찬반 견해대립이 있지만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원래의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난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이를 수 있습니다.


자연 역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인간과 피조 세계의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세기 3:17)

그로 인해 모든 피조세계가 구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로마서 8:20-22)

자연은 정복하고 개조하여 부를 창출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인간은 자연을 잘 돌보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피조 세계의 관계까지 총체적으로 회복이 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어느 집사님의 고백

한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매주 헌금을 빠짐없이 드리고 새벽기도도 열심히 나가는 신앙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운영하는 공장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몇 달째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래처로부터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이사야 58장 말씀을 듣다가 그분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예배는 드리면서, 예배 밖에서는 불의를 행하고 있었구나." 다음 날 그는 밀린 임금을 모두 정산했고, 그것이 그에게 진짜 예배의 시작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지표

인간과 피조 세계의 관계는 논외로 하더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하나입니다.

신앙을 예배당 안에 가두지 말아야 합니다.

의는 혼자 거룩해지는 수행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반드시 이웃과의 신뢰로 흘러가야 하고, 개인적 경건은 공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찬양만큼이나, 일터에서의 정직한 거래와 불의에 대한 용기 있는 목소리가 똑같이 중요한 의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5. 오늘부터 시작하는 의로운 삶 - 실천사항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의를 우리의 일상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의를 행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옥죄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 삶을 가장 가치 있게 만드는 이정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땅한 반응 - 신뢰하기 (Trust)

모든 의의 출발점은 신뢰입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더라도 신자로서의 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자신의 힘과 무기를 신뢰하며 스스로를 높인 바벨론은 겉보기에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결국 파멸할 수밖에 없고,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을 먼저 의지하기보다, 예수님을 먼저 신뢰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옳은 방향의 시작입니다.

"내가 먼저 해결해야지"가 아니라,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태도 하나가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관계 안에서 책임 다하기 (Responsibility)

단순히 규칙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신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고,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 오래 연락하지 못한 사람에게 먼저 문자 한 줄을 보내는 것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이 책임의 실천입니다.


마치며

선포되어질 수 없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실천할 수 없다면 말씀 선포가 잘못되었는지, 듣는 자가 잘못되었든지 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서 신뢰를 읽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신자들로서는 이웃을 향한 성경말씀의 선포가 제대로 되었는지, 선포된 말씀을 제대로 실천했는지 점검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성경의 '의'는 신학 교과서 안에 갇혀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서 이 역동적인 의를 살아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대할 때, 비로소 정의는 물같이, 공의는 강물같이 우리 삶을 타고 흘러갈 것입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 — 아모스 5:24


[점검하기]

1. 나는 가족, 친구, 동료와의 관계에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외면하고 있는 관계가 있지는 않습니까

2. 내 신앙 생활은 예배당 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일터와 일상에서 나의 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3. 이번 주, 내가 '의'를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작고 구체적인 행동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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