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각해 보면 엄마는 우연치 않지만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삶을 정리하셨다.
생전 바다를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해양장을 통해 동해 바다에 유골을 뿌려드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5년 전 먼저 하늘로 간 큰 아들, 그러니까 형의 유골도 엄마와 함께 보내드리기로 했다. 형의 유골을 찾으러 간 날은 10월 24일, 25년 전 형이 돌아가신 날과 같았다. 음력으로 기일을 챙겼기에 25년 전의 그날인지 몰랐다. 10월 20일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형의 유골을 찾으러 간 날이 하필 25년 전 그날이었다. 엄마는 다 계획이 있었나? 말도 안 되지만 신기하긴 했다.
엄마는 2년 전 살고 계시던 단독 주택을 처분하셨다. 아파트에 들어가서 편히 살고 싶다고 했다. 전세로 아파트에 들어가셨는데 전세 만기일자 역시 공교롭게 10월 중순이었다. 만약 주택이 있었고 전세도 만기가 한 참 남았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팠을 거 같았다.
엄마의 생일은 추석 열흘 뒤라 늘 10월이었다. 10월 초 호스피로 옮겨오신 엄마는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으셨다. 마지막 생일을 치뤄드리지 못할 거 같아 불안했다. 제대로 된 생일을 챙겨드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생일, 축하 인사를 받고 나흘 뒤에 떠나셨다.
지난 1년, 엄마의 항암기간은 그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조금은 덜어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이 아쉽고 슬프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자식들이 더 고생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1년의 기간 동안 잘 못 보던 엄마를 많이 볼 수 있었고 마지막 넉 달은 더 가까이에서 더 자주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퉁퉁 부어가는 게 맘 아팠지만 그래서 엄마 손을 더 꼭 잡고 병원을 오고 갔다. 병원을 오고 갈 때 새로나온 회사 차에 엄마를 태워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런 시간은 아마 엄마가 나에게 죄책감을 덜도록 주신 기회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임종도 지킬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회의 때문에 잠깐 회사로 출발 한 사이 다급한 아내의 전화를 받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때 까지 엄마는 나를 기다려 주셨다.
엄마는 항암 1년 동안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셨다. 그런 엄마에게 항암의 효과가 더 이상 없고,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변변하게 서로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 아쉬움을 아내에게 말하자 아내는 살아 계실 때 했던 말들 속에서 힌트를 찾아보자고 현명하게 조언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고목에 물 줘봤자 소용없다'면서 젊을 때 몸에 좋은 것들을 먹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게 기억났다. 아빠 닮으면 폐가 안 좋을 테니 담배 피우지 말고, 운동 많이 하라는 말씀도 아마 유언 중 하나였을 거 같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런저런 것들을 챙기다 보니 결과적으로 엄마는 떠날 때를 알고 많은 것을 준비하셨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이나 어느 정도의 미안함을 빼면 엄마가 준비해 주신 것들 덕분에 나는 엄마가 떠나시고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다.
2.
회사에 오기 전보다 펜타클은 많이 성장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더 키워야 할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든 PT의 전략적 방향을 디렉션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모든 제작물에 나의 의견이 도움이 될 거라 믿었다. 여전히 전략의 방향이나 제작물의 퀄리티를 올리는 일들에 나의 생각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함께 하는 동료들이 나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그들만의 의견, 생각, 창의성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리더의 큰 역할일 것이다. 내 생각의 공간, 내 의견으로 찼던 자리들을 조금씩 비우고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줄 준비를 해야겠다.